뻔뻔한 년… 네가 나에게 이렇게 질퍽거리면!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분위기에 집중할 수 없잖아… 오, 오! 그래, 그래! 좀 더 옆으로… 좀 더… 이런변태 같은 생각을 하는 내가 밉기도 했지만 술에 취해 멜랑꼬리가 된 아라가 고마웠다.
오동이가 건배 제의를 하고 이국이가 그 건배 제의에 술잔을 든다. 우리는 모두 이국이의 뒤를 따라 앞에 놓인 술잔을 높이 들어올렸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내 무릎에 엎어진 아라 때문에 술잔을 잡고 들어 올릴 수 없었다. 내 무릎에 쓰러진 아라에게 뭔가 자극이 필요했다.
“아라야, 오랜만에 친구들과 술 한 잔 하게 잠시 저리 가봐…”
저리 비키라는 나의 말에 아라가 고개를 들더니 귀찮다며 팔을 허공에 휘졌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내 앞에 놓인 술잔을 손으로 쳤다. 술잔은 엎어지며 안에 담긴 술들이 내 무릎에 떨어지기 시작하자…
“야, 야! 술!”
친구들이 엎어진 술잔의 술이 아까워서 인지 아니면 건배를 해야 하는데 술이 엎어져 안타까워서인지 소란을 피웠다. 그 덕에 아라의 얼굴은 내 중심부로 더욱 밀착되었다. 아라의 얼굴이 내 중심부에 코를 박고 쓰러지게 되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휴지 줘봐, 얘 진짜 많이 취했나봐. 큰일이네.”
아라의 주정에 놀란 가인이가 나와 아라의 자세를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테이블 위의 엎어진 술을 휴지로 닦는데 여념이 없었다. 왠지 모를 흥분감이 중심부에서 기둥이 되어 일어선가. 여기서 이러면 안 되는데…
“원숭이, 자리에서 일어나 봐. 술 좀 닦게.”
“어, 응.”
나는 아쉬웠지만 아라의 머리를 들고 자리에서 살짝 일어나 바로 옆으로 조금 엉덩이를 밀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대현이가 붙지 말라며 다시 나를 밀쳤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아라의 얼굴이 내 중심부에 정확히 밀착되었다.
잠시 딴 생각을 해야 했다. 테이블 밑으로는 친구들이 모습을 볼 수 없다. 지퍼를 살짝 내리고 빨딱 선 내 중심을 꺼낼까 말까 하는 고민… 만약 그랬다가 친구들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다시는 동창회에 얼굴을 내밀지 못할 터. 고민고민고민…
친구들은 내 앞의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 한분이 껌과 초코릿이든 바구니를 들고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눈은 살짝 떠있는 상태의 아주머니는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며 껌과 초코릿을 사달란다.
“이보세요, 제가 어려운 처지인데 껌과 초코릿 좀 사주시면 안 될까요?”
“어?”
그 아주머니의 말이 끝나자 하진이가 대꾸한다.
“어제 술 마실 때 오셨던 분이네. 어제 제가 껌 두통에 만 원 주고 샀잖아요. 기억하세요?”
“응? 어이쿠, 그럼요 기억하죠.”
“죄송한데 다음에 사드릴게요. 오늘은 돌아가 주세요.”
“그래도 얼마 하지 않는데 좀 도와주세요.”
껌 두통에 만 원이라는데 얼마하지 않다니…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악덕장사도 이런 악덕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죽했으면 이렇게 해서라도 생계를 이어갈까 하는 생각에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착하지는 않지만 착한 마음에 내가 껌을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 아줌마가 하는 말,
“아가씨가 너무 좋아 하는 것 같네.”
“네?”
아가씨가 너무 좋아 하는 것 같다는 말에 그게 무슨 뜻일까 고민을 하는데 친구들이 가인이의 모습을 확인했다. 가인이가 내 다리 사이, 중심부에 얼굴을 묻고 쓰러진 모습을 보자마자 여자 동창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소리 지른다.
“꺄! 가인아, 너 어디에 얼굴을 묻고 있는 거야 지금!”
“미쳤나봐, 어머머… 어서 몸을 일으켜.”
젠장… 젠장! 저 아주머니 때문에 완전 망했다. 내 최고의 포지션을 아주머니의 말도 안 되는 만 원짜리 껌 두통에 빼앗기다니… 순간 아주머니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셔서 저의 행복을 아사가십니까!
“그런데 아라가 저러고 있는 걸 어떻게 아셨지? 맹인이시잖아.”
응? 맞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며 도움을 요청하던 아주머니가 도대체 어떻게 이 모습을 보고 그런 말을 하셨을까? 순간 당황스러우면서 궁금해졌다.
“콜록, 콜록. 저쪽으로 가봐야겠네.”
아주머니가 갑자기 우리 쪽에 계시다가 옆 테이블로 가시는 모습에 의심이 들었다. 정녕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일부러 이렇게 연기를 하시는 것인가.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어 뭐라 할 수 없었다. 나는 이럴 때 엉뚱한 정의감(?)이 발휘된다.
“아주머니, 바지 지퍼 열리셨는데요?”
“어머나! 정말?”
껌을 팔던 아주머니는 깜짝 놀라며 자신의 바지 지퍼를 쳐다본다. 나와 우리 친구들 그리고 주변 많은 사람들이 눈치를 채기에 충분했다.
“사기꾼.”
아주머니의 살짝 뜬 실눈이 부릅떠지더니 나를 노려보며 한 마디 하기 시작했다.
“먹고 살려고 하는데 좀 도와주면 어디에 덧 나냐?! 잘났다 이놈아, 에라이~ ?!”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나는 살짝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진짜 어려운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방법이 다양하지만 이렇게 까지 자신의 정체를 숨기며 강매를 하는 장사꾼은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이 아주머니가! 제가 못할 말 한 것도 아니고!”
“너는 애미애비도 없냐?! 배고파서 좀 먹고 살려고 하는데… 치사해서 원.”
투덜거리며 술집 밖으로 나가는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보니 내가 너무 심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감정에 술맛이 뚝 떨어졌다. 의기 소심해 하고 있는 나를 향해 친구들이 괜찮다며 저런 아주머니들 많다고 위로해준다.
쓴 술잔을 매만지며 집에 있는 엄마 생각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듯 가슴이 먹먹해져왔다. 술집 창밖으로 보이는 아주머니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며 목청을 높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주머니… 죄송해요. 제가 생각이 짧았…’
라고 생각을 하고 있던 도중 창밖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앞에 웬 벤츠 차량 한 대가 서더니 차를 타고 쏜살같이 달려간다. 아주머니는 벤츠를 타고 다니는 알짜배기였던 것인가…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어른의 공경심과 효심이 어리석은 것이었을까.
“야, 봐라. 저 아줌마 벤츠 탄다.”
그러자 며칠 전 한번 만났다고 했던 하진이가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저번에 저 아주머니 불쌍해 보여서 돈 오만 원치 사줬더니 주변 사람들이 왜 그걸 사주냐고 하더라고.”
“왜?”
“저 아주머니 이 일대에서 굉장히 유명한 분이라고 하면서 새벽에 집으로 돌아갈 때는 항상 고급승용차를 타고 퇴근한다고 하더라.”
“정말?”
“그렇다니까. 그래서 내가 아까 아는 척 했는데 모르는 척 하잖아. 킥킥킥.”
나는 하진이의 말을 듣고 아까보다 더 쓰게 느껴지는 소주잔을 마시게 되었다. 내가 잘못 한 게 아니었어… 이런 젠장 할!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게 되어 있는 법… 나의 행동에 정당함을 느끼며 자축하는 의미로 소주를 또 한 잔, 두 잔을 연속으로 마시다보니 머리가 빙글빙글.
우성이가 나를 쳐다보며 걱정되는 말로 물었다.
“야, 너 술 잘 마시는 건 알겠는데 너무 무리해서 마시지마. 취하겠다.”
“아니야, 이정도 가지고 뭘.”
사실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 우성이의 말에 자극받아 술에 대한 우쭐함이 생겼다. 남자는 ‘못 먹어도 고’라는 생각을 가지며 연달아 두 잔을 더 비워냈다. 그랬더니 진짜 눈깔부터 머리까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술에 취하지 않은 척 하기 위해 일명 ‘쌘 척’을 하며 남다른 연기력을 발휘하는 나를 본 아라가 눈이 풀린 채 내 얼굴을 만지며 말한다.
“우와~ 우리 원숭이 술 잘 마신다. 안주 먹어.”
그 말과 함께 왜 이런 장난을 나에게 안치나 생각했다. 바나나를 하나들어 먹어보란다. 내가 진짜 원숭이로 보여서 이러는 것은 아니고 별명이 원숭이다보니 어렸을 적부터 친구들이 자주 나에게 했던 장난이었다.
나는 고맙다며 호리가 포크로 찍어준 바나나를 한입 물었다. 그리고 원숭이처럼 씹어대자 친구들이 여전하다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나는 그렇게 웃고 있는 친구들을 보며 속으로 말 생각했다.
‘좋냐? 이 새끼들…’
우물거리고 있는 내 입을 바라보던 아라가 다시 내 다리사이로 얼굴을 묻으며 쓰러진다. 나는 몸을 움츠리며 깜짝 놀라는 척을 했다. 친구들이 이제는 그런 아라와 나를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웃기만 한다.
호리가 그런 아라와 나를 보며 말했다.
“오늘 이러다가 네들 모텔가서 ‘응응’하고 커플 되는 거 아냐?”
“응응?”
“응, 응응. 킥킥킥.”
“어머, 호리야! 호호호.”
가인이가 호리의 말에 민망하다며 앙탈을 부리고 있고 다른 친구들이 박수를 치며 그럴 수 있을 것 같다고 오늘 자기들이 모텔비용을 줄 테니 한번 가보라며 아우성이다. 그런 친구들의 아우성이 왜 나는 기분이 좋았을까…
두빈이가 자리를 옮겨 우리들끼리만 대화를 할 수 있는 작은 술집으로 이차를 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조금 더 이렇게 앉아 있고 싶었는데 저 새끼는 눈치도 없이 또 나와 아라를 갈라놓으려 한다. 개새끼.
“그래, 이제 자리 좀 옮겨서 마시자.”
“그럼… 미안하지만, 나는 우리 애인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 되어서 나는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은데?”
호리가 애인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 되어서 먼저 간단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지금 황홀하다. 내 무릎 사이에 쓰러져 있는 아라에게 텔레파시를 보내며 혼자 즐기고 있기에…
‘아라야… 좀 더 위로… 위로…’
“이거 아쉬워서 어쩌지? 그럼 내 결혼식장에서 만나야겠네. 그때 남자 친구랑 같이 와.”
애인을 만나기 위해 먼저 자리를 떠난다는 호리에게 동규가 섭섭하다며 틀에 짜여진 예의와 같은 말을 한다. 호리는 동규를 안아주며 결혼 축하를 대신한다.
“잘살아, 대견하네. 우리친구.”
“고맙다. 그날 꼭 와.”
“나 그때 제주도에 남자친구랑 놀러가기로 했는데… 만나서 얘기해봐야겠네.”
“훗.”
제주도로 애인과 놀러간다는 호리가 나는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게는 너무 황홀한 순간이기에. 반쯤 풀린 눈으로 현재를 누리고 있는 나를 본 가인이가 변태 아저씨 그만 느끼시고 일어나라며 나의 팔을 잡는다.
“내… 내가 뭘 느껴!”
“표정에 다 써 있거든요? 아라 이제 이리 내놔.”
“나쁜 년.”
정말 나쁜 년이다. 친구가 이렇게 즐긴다기보다 호강을 하고 있는데 배가 아파서 그런 건가… 그럼 너도 나한테 달라붙지. 이런 씩으로 질투를 하며 우릴 방해하다니… 고얀 년… 별수 없이 나는 나한테 기대어 쓰러져 있는 아라를 가인이에게 인계해야 했다.
그렇게 호리가 떠나고 나와 다른 친구들이 조용하고 우리끼리 대화를 할 수 있는 술집을 찾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 명동거리… 추운 날씨에 팔짱을 끼고 걷는 연인들이 유독 눈에 띠었다. 부럽기도 하고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한 요즘…
갑자기 누군가 내 팔에 팔짱을 꼈다. 수호천사인가? 내가 모르는 마니또가 존재한 것 인가. 반가운 마음과 감동의 눈빛을 하며 내 팔짱을 낀 상대를 쳐다보기 위해 고개를 돌려다. 헉! 동규다…
“야, 너 왜 이렇게 비틀거려? 취한 것 같은데?”
“꺼져라, 병신아.”
“넘어지면 어쩌려고 그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