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속으로 (상편)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가게의 문을 연다. 나의 손때가 묻어 이제는 그 푸르른 빛에 더하여 세월이 느껴지는 입구의 문은 나에게 항상 새로운 날이 찾아 왔음을 알린다. 여느 가게 처럼 아침 나절 부터 열고 커피나 팔고 싶은 생각은 애초에 없었기에 나는 항상 느즈막한 오후에 문을 연다. 손님들도 나의 버릇을 이제는 받아들이는 가 보다. 서로가 약속을 적어 넣은 메모지들도 오후 3시가 넘어서 만나자는 글들로만 되어있는 것을 봐도 그렇다. 빼곡히 예쁜 글씨들로 적힌 메모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입구 옆의 메모판을 나는 항상 하던 버릇 처럼 찬찬히 살펴 본다. 언젠가 나도 그 메모지의 한 쪽을 차지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날은 아주 더운 81년 여름이었다. 나와 형석이는 죽이 잘 맞는, 혈액형도 같은 고등학교 동창생 이었고, 일류 대는 아니지만 다행히도 서울에 있는 대학을 들어간 것만 해도 서로가 서로의 등을 두드리면서 잘났어 정말을 외쳐대던 치기 어린 시절. 공부 외에 서로가 음악에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르고, 쏘다니던 고등학교 시절을 뒤로 하면서도 둘은 대학이 주는 자유와 낭만에 제 스스로 혼취하여 시간을 잊고 지냈었다. 고등학교 연주 모임에서 만나, 둘은 대학에 들어가면 대학가요제에 나가서 한 번 폼 나게 해보자고 서로를 을러댔었고... 형석이는 기타를, 나는 테너 색스폰을 했었는데, 형석이는 음악적인 재주가 아주 뛰어 나서 현악기 스타일의 것들은 조금만 연습해도 비스무그리한 소리를 내곤 해서 내가 놀란 적이 많았다. 그 당시 형석이는 흑인음악에 심취해 있었다. 비트가 강하고, 디스코가 판치던 시절, 이단아 처럼 흑인 음악 예찬을 펼 때면 무슨 혼령에 도취 된 듯이 강렬한 눈빛으로 강변을 늘어 놓았었다. 나는 그 친구의 그런 열정이 부럽기도 했고, 유일한 동조자 이기도 했다. 우리는 고등학교 시절 유행했던 빽판(이름하여 해적판이라고도 하였음)을 이태원을 뒤져가면서 사다 날랐고, 기존의 라이센스 음반보다 음질이 엄청나게 뛰어 났었던 빽판의 초판 버전을 구하기 위해 예약까지도 불사 했던 열렬광들 이었다. 대학은 우리들을 폭 넓은 허용의 바다로 인도하긴 했어도 대학에 들어온 대부분의 학우들은 우리 같이 별난 취미를 갖고 있질 않았고, 이제야 배우려고 머리를 기웃거리는 판이어서 오히려 우리 두 사람은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면서 학교가 다른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늘상 붙어 다닐 수 밖에 없었다. ‘진우야, 나 어제 퀜시 죤스거 한 장 샀다. 고것도 오지지날 원판으로….낄낄’ ‘엉, 어데서? 진짜 오리지날 원판?’ 그 당시, 을지로의 풍전상가 밑에는 외국의 원판을 밀수로 들여와 판매하는 곳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 곳을 자주는 갈 수가 없었다. 워낙 비싼 가격 때문 이었다. 원판을 덮고 있는 얇은 버진팩은 세관의 눈을 피하기 위해 사용하던 것처럼 위장해서 들여왔었는데 LP판 껍질을 교묘한 방법으로 오픈 해서 들여온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사기전에 비닐 확인은 했냐? 냄새는?’ 이 두 가지는 바로 우리 끼리의 비법이기도 했다. ‘고롬 내가 누군데, 아쟈씨가 비닐을 열어주면서 디스크가 빠져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서 샀지롱.’ 초짜 들이 가면 속고 사는 것이 대부분 이었다. LP판의 위와 아래에 한 2센치 정도 되게 비닐을 오픈 하지 않으면 절대로 디스크가 그 비닐을 찢기 전에는 나올 수 없는 규격을 이용한 밀수 방법이었다. 게다가 그 당시 한국의 라이센스 판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콩기름을 사용한 원본 LP 판 껍질에서 나는 고소한 인쇄잉크 냄새도 다른 확인 방법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그렇게 형석이와 나는 다른 대학생들과는 유별난 행로를 살았다. 카페를 가더라도 그 당시 유명했던 이태원의 올뎃재즈나, 대학로의 블랙 엔드 화이트, 명동의 가무 같은 곳을 다녔다. 커피 한잔이나 혹은 맥주 한 병이면 하루종일 웨이터의 눈치 보지 않고 편한 소파에 파묻혀 듣고 싶은 흑인 음악들을 실컷 들을 수 있었던 그 당시의 시절은 두 사람에게 있어서 소중한 추억 중 에서도 버릴 수 없는 것들로만 채워진 순간들 이었다. ‘진우야, 근데, 너 올뎃재즈 에서 금요일 저녁마다 재즈세션 있는 것 아냐?’ 나는 들은 적은 있는데 내용을 잘은 몰랐다. ‘잘 몰라. 왜?’ ‘그 세션에 미군 부대의 재즈 팀이 나와서 라이브로 연주한데, 한번 안 가볼래?’ 나는 귀가 솔깃 했다. 내가 연주하는 악기가 색스폰 이기도 했지만 재즈는 나에게 하나의 커다란 우상적인 이미지의 하나였기에 형석이의 제안은 나에게도 특별하기는 마찬가지 였다. ‘그리고, 손님 중에서 가능한 사람은 그 사람들과 같이 세션에 동참할 수도 있대 나봐. 어때?’ ‘무조건 악기만 들고 갈 수는 없잖아, 그 사람들도 잘 알고, 우리도 연습을 해야 할 곡이 우선 준비 되야지.’ ‘곡은 이미 정했어. 그루버 워싱턴 주니어의 와인라이트, 어떨까?’ 형석이의 선곡은 참 놀라왔다. 아주 부드러우면서도 잔잔한 소프트 재즈 이면서 리듬 앤 블루스의 분위기도 적절히 가미되어 있는 연주곡 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 곡쯤은 그 곳에서 세션을 한다는 미군들도 애드립으로 나마 장단을 맞출 것 같아 보였다. 형석이가 리드 기타로 키를 잡아 나가고 내가 색스폰으로 메인 멜로디를 연주하면 드럼과 베이스는 그에 맞추어 반복적인 코드와 비트로 내 뒤를 받쳐주면 될 것 같았다. 둘은 의기투합 되어 그 날로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우리집의 지하실로 집합했다. 항상 연습을 할때면 색스폰의 소리가 밖으로 나갈 것에 대비해서 부모님이 지하실을 개조해서 만들어 주신 나만의 연습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리는 2주일 후, 금요일 저녁을 타겟으로 맹연습을 했다. 에어컨도 없이 선풍기 바람만으로 땀을 줄줄 흘려가면서 지하실 방에서 한여름을 악기 연주로 떼우고 있는 두 놈의 대학생이 그 당시 부모님들로서는 이해가 가질 않으셨을 것이다. 허구 헌날 모여 앉아서 빤스 차림의 맨몸으로 연습을 하다 보면 나야 색스폰 과의 자세도 자세려니와 겨드랑이가 조금은 편했지만 전자기타를 안고서 연주를 해야 하는 형석이 로서는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편치 않는 음역이 연주되면 원곡을 다시 틀어야 되는데 지금이야 CD플레이어가 많이 보급되어 듣고 싶은 부분을 손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그 당시에 LP판을 되돌리면서 악보를 보면서 연주를 따라 한다는 것은 무진장의 인내가 요구되던 시절이었다. 그럭저럭 악보 없이도 GWJ(우리는 그당시 그루버 워싱턴 주니어를 그렇게 불렀다)의 와인라이트를 비스름하게 연주하게 되자, 우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목요일 저녁, 올댓재즈에 오디션을 받으러 갔다. 그 날은 여름 소나기가 한차례 퍼붓고 지나가서 길거리는 조금 시원해 진 듯 했지만 저녁이 되면서 후끈한 열대야가 다시 몰려 오고 있던 저녁 이었다. ‘안녕하세요? 금요일 세션 때문에 왔는데요.’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미국사람과 얘기중 이었다. ‘아, 그래요? 학생들 처럼 보이는데, 연주해 본 경험은 있어요? 재즈는 생소한 분야라서…’ ‘한번 들어 보실 래요?’ 그러자, 주인은 그 미국사람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자, 놀라는 눈짓으로 우리에게 악수를 청했다. 우리는 멋모르고 악수를 하면서도 영문을 몰랐다. 그 사람은 바로 그 밴드의 베이시스트 였다. 주인 말로는 드럼이 없지만 베이스로도 충분하게 오디션은 가능하니 해보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항상 하던 대로 하이파이브를 했다. 쩍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우리는 악기를 풀었다. 입구에 왼쪽 끝에 있는 작은 무대로 올라가 형석이는 앰프에 코드를 꽂고는 능숙한 솜씨로 튜닝을 했고 나는 색스폰에 리이드를 새 것으로 갈고 무대에 올랐다. 우리는 안 되는 영어지만 그 사람에게 곡 이름을 얘기해 주었다.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드는 폼이 느이가 그걸 우짜 하겠노 라는 표정이었다. 나와 형석이는 서로 마주 보며 빙긋이 웃었다. 곧바로 연주가 시작되고 우리는 한치도 틀림이 없이 연습한 대로 리듬을 밟아 나갔다. 내가 긴장한 탓인지 중간의 애드립 부문에서 옥타브를 놓쳤던 한 부분 이외에는 거의 완벽한 솜씨였다. 그 미국인은 연주를 하는 도중에도 뷰티풀을 연발하면서 베이스를 연신 흔들었다. 연주가 끝나고 주인의 박수소리 보다 더 큰 환호가 좌석에서 터져 나왔다. 정신이 없어서 실내에 손님이 없는 줄 알고 있었던 우리 두 사람은 그것도 커다란 소리로 환호성을 보내는 사람이 다름아닌 여자라는 사실에 놀랐다. ‘어이구, 우리 젊은 분들이 벌써 팬이 생겼네. 내일 볼만 하겠는데…’ 미국 사람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악수를 청하고는 가게를 나갔다. 아마도 세션 상대가 정해졌기 때문인 것 같았다. 무대에서 내려와 우리는 입구에서 마주 보이는 스텐드에 주인과 마주 앉았다. ‘곡은 이거 하나 뿐인가? 한 서너곡 하면 좋을 텐데…그런데 이거 뭐야?’ 일하는 웨이터가 주인도 모르게 우리에게 날라다 준 것은 보기에도 시원한 냉커피 두 잔이었다. 손님중의 누군가가 우리에게 보낸 것이었다. 바로 그 환호성을 올리던 그 여자. 올댓재즈의 실내에는 낮에도 사람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었다. 그래서 형석이와 나는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 구섞의 여자에게 잔을 들어 보이며 잘 마시겠다는 답례를 보냈다. ‘진우야, 너 저 여자 봤냐? 우리 보다 나이는 들어 보이는데 몸매 죽인다. 얼굴은 잘 안 보이는데….’ 형석이가 테리우스 같은 긴 머리를 치렁치렁하게 흔들면서 기타를 등에 메고 나타날 때면 그 당시 대학생 연인들의 집합장소 였던 종로2가 포켓까페 골목을 무대로, 날고 기던 대학 초년생 들은 넋을 잃고 바라다 보곤 했다. 게다가 그런 형석이 주변에는 항상 이쁘장한 아가씨들이 들끌었던 것은 물론이고…역시 형석이는 여자 보는 눈이 재빨랐다. 그 여자는 일행들을 뒤로 하고 스텐드 쪽을 향해 걸어왔다. 우리는 일순 긴장했다. ‘연주 잘 들었어요. 학생이세요?’ 우리는 선생님 앞의 학생처럼 둘이 동시에 네하고 대답하고는 바라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얇은 린넨 블라우스에 살짝 비치는 브레지어, 타이트한 흰색 스커트는 가운데가 심하게 위로 찢어진 야한 디자인 이었다. 항상 책을 팔에 안고 화장품만 잔뜩 들어간 가방을 옆에 둘러메고 나 대학생입네 하며 돌아다니던 그 당시의 여학생들만을 보아오던 우리로서 이른바 요즈음 일컫는 연상녀를 대하고 있는 것은 지극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당시의 풍조로 연상의 여자를 대한다는 것은 시대조류를 역행하는 분위기가 다분했기 때문이었다. ‘두 분 다 젊으신 것 같은데 어디서 그렇게 좋은 솜씨들을 닦으셨어요?’ 계속되는 칭찬에 우리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우리 옆 자리에 앉았다. 학교 얘기며, 연주에 대한 우리들의 주변 얘기가 이어지면서 우리는 점차 스스럼 없이 가까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형석이 옆에 앉은 그녀는, 또다시 버릇처럼 열변을 토해내는 형석이의 흑인음악 예찬론을 지긋한 눈길로 응시하면서 들어주고 있었고… 얼마 있지 않아서 그녀의 일행으로 보이는 한 무리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나가자고 말을 했다. 그녀는 내일 세션때 보자는 짤막한 인사를 하고는 까페를 나섰다. 주변의 일행은 그 당시 척하면 알아볼 수 있는 오렌지 들이었다. 낑깡도 토종귤도 아닌 원조 오렌지 들처럼 보였다. 나가자면서 손에서 덜그렁 거리는 자동차 키가 우선 그랬고, 그들의 머리 스타일들이나 차림새가 동네 미장원에서 다듬은 솜씨가 아니었고 옷들도 신촌 이대앞 패션이나 남싸롱 패션은 더더욱 이나 아니었다. 이름하야 다른 부류의 인간들 이었다. 그녀는 그 속에 속한 주목 받는 꽃이었고…아무튼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것보다도 우리는 내일의 세션 걱정으로 우리집에서 자면서 다시 한번 연주를 맞추기로 하고 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직행 좌석버스에서 우리는 그녀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진우야. 그 여자 뭐 하는 여자 같아 보이던?’ ‘글쎄….형석이 너! 그 여자에게 관심있냐? 나이도 꽤 있어 보이던데…’ 나는 형석이를 나무라면서도 내심 나도 끌리는 구섞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는데 참고 말았다. 항상 소심하기로 유명한 내가 그런 말 을 한다는 것이 왠지 나와 걸맞지 않게 느껴 졌기 때문이었다. ‘내일 그 여자 나오면 세션 끝나고 닭장에나 가자고 한 번 해봐야지.’ 그 당시 초저녁에 문을 열고 10시 반이면 파장을 하는 이른바 고고장들을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 무교동의 코파카바나, 신촌의 우산속, 강남의 스튜디오 80등이 그런 곳이었다. 나는 형석이가 그 여자를 마음에 두고 있음을 알았다. 다음 날이 되어 우리는 악기를 챙기고 이태원으로 향했다. 일기예보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종일 소나기 같은 폭우가 예상된다는 김동완 기상캐스터의 예보에 우리는 한 풀 기가 꺾여 있었다. 형석이는 하염없이 주룩주룩 내리는 소나기를 보면서 그 여자가 이 빗속에 올 수 있을까 하고 한숨을 내 쉬기도 했다. 저녁이 되어 그 세션 팀들이 도착하고 우리들과 인사를 나눈 뒤에 먼저 세션 팀이 주옥 같은 스윙재즈 곡들을 선사하기 시작했다. 밖에는 비가 처량하게 퍼붓고 실내에는 분위기 있는 재즈가 넘쳐 나는데 장내의 손님은 한산해서 그 분위기가 을씨년스럽기 까지 했다. 우리 차례가 다가왔을 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어제의 그 여자 였다. 우산이 없었는지 온 몸에 비를 홈빡 맞고서 머리까지 온통 젖어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눈인사도 할 사이 없이 무대에 올랐다. 그녀는 일행이 없이 스텐드에 홀로 앉아서 우리의 연주가 시작되기도 전에 검고 가느다란 모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파랗게 허공을 가르는 담배 연기와 맞추어 우리의 연주는 시작 되었다. 그녀는 멍한 시선으로 무대를 바라보면서 한 손으로는 비에 젖어 물을 떨어뜨리고 있는 머리결을 쓸어 올렸고, 주인이 권하는 수건도 마다한 채, 어깨를 움추린 채로 우리의 연주를 경청했다. 포개 얹은 그녀의 종아리가 아스름한 실내의 불빛을 받아 미처 닦여지지 못하고 흘러내리는 빗방울과 함께 반사되고, 그녀의 고혹 스런 자태는 젖어있는 그녀의 몸뚱아리와 함께 흠씬 우리 둘의 머리를 강한 햄머 같이 두들겨 대고 있었다. 언제 끝났는지도 모르게 연주는 막을 내리고 장내의 박수소리를 들으면서 우리 두 사람은 무대에서 개선장군 마냥 걸어내려 왔다. 게다가 세션맨 들이 모두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해주는 통에 정말 혼이 쏙 빠져 나가는 듯한 짜릿한 흥분을 느끼기도 했다. 연예인들이 이 맛에 팬들의 성원에 연연해 하는가 보다 라는 생각을 불현듯 했고…그녀 또한 우리 두 사람 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환호성은 없이…. ‘괜찮았어요? 비가 이렇게 오시는데 와 주셨네요. 저는 혹시 않 오시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는데…’ 형석이가 먼저 붙임성 있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웃음으로 답했다. 나는 뻘쭘히 서서, 형석이의 뒤에서,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웃고 있는 그녀의 치아가 무척 희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형석이는 어제 이후, 그녀에게 별명을 하나 붙여 주자고 했다. 다름아닌 입술이었다. 얼굴은 한국 여성처럼 생겼는데 그 여자의 입술은 다분히 도전적이고, 그 당시 여자들이 별반 선호하지 않는 적쥐색 립스틱을 발랐기 때문에 붙인다는 별명이었다. 입술. 그녀의 입술은 정말 에너지를 뿜어내는 것을 색깔로 막고 있는 듯한 형태였다. 누구라도 그녀의 입술을 맛보면 자신의 입술이 뜯겨져 나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 정도로 파괴성이 농후한 특이한 느낌의 입술이었다. 형석이는 그녀와 마주하듯이 스텐드에 앉았고, 나는 형석이의 뒤에 앉아 주인 아저씨가 만들어 준 냉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이 없었다. 형석이 혼자 신이 나서 그녀에게 수작을 걸고 있는 것으로 보아, 기어이 닭장얘기를 꺼낼 모양이었다. 나는 화장실에 다녀 오겠다며 자리를 피했다. 오줌도 마려웠지만 형석이를 따라서 닭장에 갈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때, 화장실 안으로 형석이가 뛰어 들어왔다. ‘진우야! 너 돈 좀 가진거 있냐?’ 형석이는 다급한 목소리 였지만 연신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형석이 에게 지갑 속에 든 비상금 5만원을 달랑 내주었다. 나야 회수권으로 집에 가면 그만 이었으니까. 지금 처럼 신용카드가 있던 시절도 아니라서 현금만이 유일한 지불수단 이었었다. ‘오늘 내 기타 좀 갖고 가라. 알았지? 이유는 묻지 말고…’ 나는 이유를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형석이는 아마도 그녀와 만리장성을 쌓고 싶은 모양 이었다. 그 입술에게 지 입술이나 뜯기지 말지. 녀석 허둥대기는…내가 화장실을 나서는데 입구에서 나가려고 하던 그녀와 형석이를 보게 되었다. 나는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그녀는 형석이를 따라 나가면서 나를 돌아다 보았다. 입구의 문이 열리고 바깥에서 들리는 장엄한 빗소리와 더불어 그녀의 촉촉히 젖은 눈매가 나를 보고 있었다. 많은 의미가 담긴 듯한 시선은 나에게 무언의 메시지 같은 것으로 가슴을 때리고… 나는 또다시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고개를 떨구는 그녀를 보면서 다시 입이 닫히고 말았다. 에이 병신 자식! 따라가도 될까요라고 한마디만 물어보지! 그렇게 그녀는 형석이와 내리는 폭우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집으로 오는 도중에 들고 있는 악기의 무게 보다도 더욱 무겁고 음울하게 느껴 졌었던 그녀의 그 마지막 시선이 마음에 걸렸다. 다음날이 되어도 형석이 에게서는 소식이 없었다. 나는 단연코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겠구나 하고 단정 지었다. 3일째 되는 날, 저녁에 형석이가 집으로 찾아왔다. ‘야, 임마, 어떻게 된거야? 왠 연락이 되야지?’ 나는 다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모른 척하고 나무 래고 있었다. ‘어때, 진우야, 내 얘기가 궁금하지 않냐?’ 나는 궁금했다. 몹시도. ‘야, 윤희씨, 정말 끝내줬다. 춤도 잘추고, 술도 잘 먹고, 놀기는 얼마나 잘 놀던지…우리랑 5살 차이가 나긴 했지만 정말 아쉽더라. 나이만 어떻게 차이가 안져도 데리고 살아 볼 만 한 여잔데 말이야. 그리고, 옛다 꿔간 돈. 나 그날, 땡전 한 푼 안 쓰고 홍콩 갔다 왔지롱. 그 여자 돈도 끝내주게 많은 가봐.’ 나는 대학 초년생인 형석이가 너무 장황한 데까지 생각을 연장시키는 것이 아닌가 했다. 인연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렇게까지 그녀를 가늠질 할 필요까지는 없는데라고 생각했다. ‘둘이 잤냐?’ ‘고롬, 물론이쥐. 이 형님이 끝내줬어. 나중에는 벌벌 기더라.’ ‘아니, 벌벌 기다니, 무슨?’ ‘임마, 척하면 삼천리고 쿵 하면 감 떨어지는 소리지. 이 형님의 대포 맛을 보고 나니 한번 더, 한번 더 하는 게 그 날밤, 네번 이나 허질 않았겄냐?’ 뻥도 조금 섞였겠지만 무슨 무용담 줏어 담듯이 형석이는 그녀를 꿰찬 것이 무슨 훈장이나 되는 것처럼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그만 하자고 했다. 어차피 뒷감당 없이 작업 끝에 두 사람이 하룻밤, 원나잇 스텐드로 섹스를 한 것 가지고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한 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모욕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돌아가기 전까지 계속해서 형석이는 그녀와의 섹스 시에 그녀가 어쨌다, 저쨌다 하면서 시시콜콜이 중계방송을 하다가 갔다. 나는 왠지 마음이 씁쓸했다. 마지막으로 보이던 그녀의 눈 빛이 마음에 남았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두어 주가 지난 어느날, 나는 홍대 앞의 한 까페에서 가게를 봐달라는 졸업했다는 동아리 선배의 부탁을 받았다. 할 일도 마땅치 않았고 음악이나 실컷 듣자는 심산으로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홍대 입구와는 떨어진 조금 한산한 지역에 주택가가 시작되는 지점에 있는 그 까페는 오히려 화랑에 더 분위기가 가까웠다. 나는 첫 날, 음악을 틀려다가 터무니 없이 부족한 디스크 때문에 꼭지가 뺑 돌아버렸다. 그래서 마음 먹고 집에 있는 LP들을 한짐 지고 택시를 타고 까페로 되돌아 왔다. 나는 심통도 났지만 이제는 내 마음대로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틀자는 심정으로 사람도 별로 없는 카페 안이 떠나가도록 음악을 틀어 제꼈다. 혼자서 톰 브라운의 트럼펫 연주곡을 듣고 있는데 누군가 바람처럼 까페 안으로 들어왔다. 뒷모습 만이 보이고 나는 기계적으로 어서 오세요 라고 응대했다. 그 여자는 구섞진 자리를 찾아서 나와 등을 대고 앉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메뉴판을 들고 그 손님 앞에 섰다. ‘손님, 무얼 드시…’ 나는 깜짝 놀랐다. 윤희 라는 그 여자 였다. 피워 물려던 모아 담배를 입에 문 채로, 그녀는 멍하니 나를 올려다 보았다. ‘아, 그때 올댓재즈 에서, 맞죠?’ 그녀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도 반가운 척이라도 해주어야 했다. ‘세상 참 좁죠?’ 나는 그녀에게 지나친 냉방으로 선선할 거라며 따스한 커피를 갖다 주면서 그 앞에 앉았다. ‘여기는 어떻게?’ ‘이제 출국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아서, 학교의 친구들이나 만나고 가려 했는데, 방학이라서 그런지 만나기가 여의치 않네요.’ 나는 그녀가 뉴욕 근처의 델라웨어라는 곳에서 공부중 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교 빼고는 시골이나 다름 없다는 그 곳에서 그녀는 현대미술사를 공부하고 있다고 했고, 서울에 방학중에는 나오는데 겨울에는 방학이 짧아서 나오기가 힘들 다는 말을 했다. 오늘따라 그녀는 그때와 다르게 화장을 깨끗이 지우고, 고등학생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간단한 기초 화장도 없이 맨 얼굴로 나를 대하고 있는 그녀 인데도 나는 화장을 한 모습보다 더 보기 좋다는 웃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톰 브라운의 음악이 끝나 가고 있음을 알고서 판을 갈고 오겠다고 얘기하고는 쏜살같이 턴테이블로 향했다. 얘기하기 좋은 음악을 고르다 고르다 나는 스티비 원더의 Send one your love이라는 곡을 자동 연속 플레이로 해놓고 자리로 돌아왔다. 두 남녀가 불어로 와인을 따르면서 속삭이는 인트로가 좋아서 항상 애청하는 곡이었다. 그녀는 그 곡을 알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곡인데, 이 곳은 신청하는 사람의 마음처럼 노래를 틀어주나 보죠?’ 나는 그녀의 조크가 가슴에 와 닿았다.. ‘그때, 연주, 너무 좋았어요. 그 말을 꼭 다시 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을 줄 알았어요.’ 나는 묻지 말아야 할 말을 아무런 생각 없이 던지고 말았다. ‘형석이 와는 다시 만나셨어요?’ 그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묵묵히 담배를 피운다. ‘……사람이 사는게 그런 거 같아요. 원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거쳐가는 사람들로 인해서 결국에는 원하는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된다는 얘기 말이죠.’ 어디 선가 책에서 읽은 얘기였다. 그녀가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 ‘미국 생활은 지독하게 외롭죠. 여기서 보기에 유학생활이라는 것이 화려한 외출처럼 보여도 막상 한국 사람 하나 없는 이방인들로 가득찬 집단에서 생활하다 보면 자기가 향수병인지도 모르게 한국을 그리워 하게 되요. 이곳과는 상상할 수도 없는 독특한 방법으로 살게 되죠. 이를테면, 동물적인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서 라기 보다 한국사람이기 때문에 같이 살 수밖에 없는 그런 사연이 있게 된다고 할까요? 형석씨는 아주 똑똑한 사람 이에요. 섬세하기도 하고 열정이 있고, 그런 사람은 미국에 가면 성공할 수 있어요. 적어도 저처럼 덜 떨어진 낙오자가 되지는 않을 거에요. 형석씨는 음악때문에라도 미국에 가고 싶어 하드라고요.’ ‘형석이가요?’ 금시초문 이었다. 3대독자 외아들이기 때문에 자신은 군대에 갈 필요도 없고, 그래서 다른 사람처럼 뒷 꼭지 가렵게 시리 병역문제로 골머리 썩으면서 외국에 유할 갈 필요가 없어서 좋기는 한데, 머리가 모자란 게 흠이라고 농담처럼 얘기하곤 했는데 그게 진심인줄은 모르고 있었다. ‘출국하기 전에 다시 보기로 했었어요. 미국 유학에 대해서 저에게 조언을 들을 것이 있다고 해서요.’ 나는 오랜 시간 동안 형석이를 사귀어 왔지만 그런 계획을 갖고 사는 지는 정말 몰랐다. 이럴 때면 어김없이 나는 눈 주위가 아파 오면서 두통이 밀려왔다. 갑자기 새로운 사실들을 접하거나 신경이 곤두설 때면 언제나 처럼 두통이 오고, 집안 사람들은 알지 못했지만 내 주머니에는 이럴 때를 대비해서 항상 몇 알의 사리돈이 들어 있었다. ‘언제 출국하시는데요?’ ‘이번 주 토요일 이요.’ 나는 벽에 걸린 달력을 보았다. 앞으로 3일 후. ‘촉박하네요. 오늘은 뭐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으세요? 친구 분을 만나신다고…’ ‘오늘은 어차피 틀린 것 같죠?. 계획이 어그러 졌으니 오랜 만에 느긋하게 혼자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아요. 근데 여기서 일하세요?’ ‘네, 선배 형이 부탁해서요. 휴가철이라 일할 사람도 마땅치 않아서 제가 봐주기로 했지요. 피서지에서 고생하는 것보다 시원하게 냉방 잘되는 곳에서 듣고 싶은 음악이나 실컷 들으려 구요.’ 그녀는 나에게 오늘 하루가 비었으니 이 곳에서 시간을 보내도 되겠느냐고 물어 보았다. 나는 아주 반갑게 그녀의 부탁을 승낙했다. 그녀는 나의 승낙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신이 먹은 커피 잔과 재털이를 들고는 카운터 뒤의 주방으로 들고 갔다. 내가 해도 된다고 말렸지만 막무가내 였다. 미국에서도 주방보조나, 웨이트리스 아르바이트로 이런 것쯤은 문제도 아니라면서 팔을 걷어 부치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손님이 오늘은 아무도 오지 않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 바램과 다르게 카페는 그 날 따라 젊은 이들로 정신 없이 붐볐다. 날씨도 날씨려니와 모두들 피서계획을 위해서 학교 주변에서 만나 계획들을 세우기에 여념들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그녀는 날을 아주 잘 잡아서 온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랜만에 사람 구경 많이 한다며, 너무도 기꺼워 했다. 나는 음악을 틀면서 그녀와 함께 서빙을 하느라 눈코뜰 새 없이 시간을 보냈다. 어느새 저녁 11시가 되고, 난 가게 문을 닫는 것과 동시에 그녀와 늦은 저녁을 차려서 홀의 중앙에 탁자를 갖다 놓고 마주하게 된다. 오랜만에 힘이 들었다며, 그녀는 어깨를 주물렀다. ‘힘드셨죠? 근데, 제가 듣기로는 누님 뻘인데 말 놓으시지요.’ ‘아니에요, 미국에서는 만학도 들도 많기 때문에 나이가 어리다고 혹은 많다고 말을 쉽사리 놓을 수가 없어요. 버릇이다 보니…부담스러우세요?’ ‘아니오, 그런 것은 아니고… 저 맥주 한잔 할께요.’ 그녀에게도 나는 맥주를 권했다. 유리잔을 내밀자, 그녀는 아니라며, 맥주병 목을 내밀면서 건배를 하자고 했다. 나는 그런 문화에 대해서는 지식이 없었다. 병 채 마시는 것은 쌍놈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들어왔기에…그래도 나는 스스럼 없이 그녀와 병목으로 건배를 했다. ‘우리, 음악이나 들을까요? 제가 골라도 되죠?’ 우리 라는 단어에 나는 찔끔 놀랐다. 친밀감을 격앙 시키던 그 우리 라는 단어에 나는 한 껏 들떴으며, 그녀는 한참을 고르더니만 곧 이어 자리에 돌아왔다. 그것은 로버타 플랙의 노래였다. ‘이 노래 아세요?’ ‘로버타 플랙이죠?’ ‘이 노래는 사연이 깊은 오래죠. 이 노래의 듀엣을 했던 남자 가수가 자살 했거든요. 이름이 하써웨이 뭔가 였는데, 뭐더라?…’ ‘자살 이라니요?’ ‘연상이었던 로버타 플랙을 짝사랑한 나머지 그녀에게 구혼 했다가 거절 당하자, 자살했거든요. 제목처럼 가까이 가려고 했지만 이 세상에서는 가까이 갈 수 없음을 깨닫고 그만 목숨을 버린 거죠. 용기 있는 사람이었어요. 바보 같지만…’ 그 노래는 Closer I get to you라는 노래였다. 그렇게 슬픈 사연이 있는 줄은 몰랐다. 그녀는 맥주를 들이켰고, 뒤로 조금 제껴진, 그녀의 목젖과 하얀 피부와 함께 드러나는 그녀의 목선은 어깨와 더불어 안정감이 높은 스타일을 내게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그 남자 가수의 느낌을 조금은 이해해요. 자존심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자존심이 상한 것은 자신의 목숨을 버릴 만큼 중요한 원인이 될 수 없죠. 난 유학생활 중에 …….한 남자와 ……동거를 했어요. 같은 유학생의 처지이고, 서로가 외롭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고 그래서 흔쾌히 그 사람과 같이 살기로 했구요. 나 이런 얘기해도 부담 안되죠?’ 나는 괜찮다고는 했지만 유학생의 신분으로 그 당시 동거를 했었다는 얘기는 그 당시 나의 정서로서는 별로 달갑지 않은 주제 였음은 분명했다. ‘그 사람은 철저한 완벽주의자 였어요. 서울에서 걸려올 수도 있는 국제전화에서 그 당시의 관계를 숨기기 위해 아파트 안에 전화를 따로 두었고, 귀국할 때를 대비한다며, 필름에서 조차, 꼬투리를 남기지 않으려고 사진은 언제나 자신들의 사진기로 찍게끔 했고, 둘이 같이 찍는 사진을 위해서는 중고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구입했을 정도니까요. 그래서 미국 유학을 하면서 찍은 사진에는 우루르 몰려서 찍은 사진 이외에는 전부 배경을 뒤로 하고 혼자서 찍은 것 밖에 없구요. 그나마 귀국 할 때는 내가 보는 앞에서 그 폴라로이드 사진을 모두 태우고 갔고…저 담배 좀 피울께요.’ 그녀는 백에서 그녀가 주로 피우던 가느다란 검은색의 모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나도 하나 달라고 했지만 나는 첫 모금에 그 쓴 맛으로 인해서 얼마간을 피다간 꺼버리고 말았다. ‘그 사람은 열정은 있었지만 나와의 관계에서는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저를 철저히 이용하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죠. 커리큘럼을 따라 잡으려면 엄청난 시간의 투자와 노력, 자기 관리가 필요한데, 그 사람은 시도 때도 없이 섹스를 요구하는 타입이었어요. 나는 섹스 후에는 절대로 공부를 다시 할 수도 없었는데 그 사람은 섹스 후에도 밤을 새고는 새벽에 나를 다시 깨워서는 저를 들복았고.. 아침이면 나는 풀곤죽이 되어 버린 몸으로 아침조차도 차려먹기 힘들었는데 그 사람은 조깅을 빼먹는 적이 없었고, 새벽같이 도서관으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 그런 철인 같은 사람이었죠. 그 당시 아무것도 모르는 나로서는 그 사람만이 유일한 버팀목이었고, 나의 안식처 였는데 그 사람은 나를 일개 섹스의 배설구 정도로 알고 있었던 거죠. 그러는 사이 저도 조금씩 유학 생활에 익숙해지고, 그 사람의 패턴에 서서히 적응되어 가는 것을 느꼈어요. 그 사람처럼 저도 섹스 머신처럼 바뀌어 간 거죠. 나는 그 사람과 살았던 2년 동안 정신과 치료를 자주 받았어요. 보험도 되지 않아 비싼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치료를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 사람의 파격적인 섹스요구 때문이었죠.’ ‘파격적 이라뇨?’ ‘DP라고 들어봤어요?’ 지금에야 알아듣지만 나는 그 당시 섹스 경험이 없었고 그런 지식은 도무지 관심이 없어서 인지 그녀가 하는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외국 사람들은 섹스의 종류를 부를 때, 특별한 단어를 쓰죠. 이를테면 DP라고 하면 Double Penetration이라고 해서 남자 둘에 여자 하나가 하는 것이고, Orgy는 이름하여 다수의 남녀가 혼음을 하는 거고…아무튼 그 남자는 나와 살면서 나를 그런 부류들에게 자연 스럽게 접목시켰어요. 정신이 뺑글 돌 지경이었죠.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광란의 섹스가 벌어지는 하루 하루가 저에게는 지옥으로의 급행열차에 탄 기분이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