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을 해치우다 - 3부 감상해 보세요 | 야설넷

그녀들을 해치우다 - 3부
최고관리자 0 50,150 2022.11.02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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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을 해치우다여자가 더 무섭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진짜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연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섹스를 하고 있던 상황에서 몸을 약간 빼더니 곧바로 옷을 입었다. 내게도 옷을 입으라는 눈치를 줘서 나도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그 상황에서도 밖에서는 죽인다는 소리와 함께 문이 들썩거렸는데, 정연이는 아무 말없이 112로 전화를 걸어서 현재의 상황을 말하고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 밖에서 소리를 지르는 남자친구의 절규를 전화기를 통해 전했다. 5분 내에 온다는 메세지를 들은 정연이는 3분을 더 기다렸다가 갑자기 문을 열었다. 체구가 그리 크지 않은 정연이의 남자친구는 한 170센치 이쪽저쪽의 키였는데, 정연이의 침대에 앉아있는 나를 보자 흥분해서 달려들려고했다. 그 때 정연이가 말했다. "지금 경찰 오고 있어. 오빠 니가 소리지르는 거 다 들렸거든. 아까전에 신고했으니까 곧 올거야. 기물파손죄랑 협박죄로 신고할거야. 정식으로 고소할거라고. 오빠 너 공사 준비하지. 빨간 줄 긋고도 국가기관에서 일할 수 있을까? 오빠 인생 다 끝나는거야. 그러니까 경찰와서 잘 해결하려면 문값 30만원 내놓고,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는 문자메세지 나한테 보내. 그리고 자필로 쓰고 지장찍어서 와. 물론, 지금은 경찰서에 가야 해. 내가 지금 여기서 오빠를 그냥 보내면, 내가 괜히 신고한 게 되니까. 오빠, 그 동안 나 만나면서 오빠가 더 좋았잖아. 그만하자." 쉴새없이 쏘아붙이는 정연이의 말에 거센 기세를 흘리던 정연이의 남자친구의 눈이 순식간에 죽어버렸다. 뭔가 허망해 하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타이밍에 경찰이 몰려왔다. 방엔 정연이 하나와 나와 그 남자친구가 있었으므로, 경찰은 둘 중 누가 범인인가를 물었고, 정연이는 저 사람이요라면서 갑자기 울먹거려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난 좀 어이가 없었다. 정연이는 울먹이는 소리였지만, 분명한 어조로 그 남자친구의 잘못을 말했고, 남자는 허탈과 허망이 섞인 눈으로 믿을 수 없다는 말만을 되뇌이며 경찰서로 끌려갔다. 경찰이 왔다가면서 옆방이라던가 몇 사람들이 방안을 힐긋거렸고, 사람들의 시선에는 난 분명히 나이깨나 먹어서 어린 여자애를 탐하다가 어린 대학생 남자애를 경찰에 보낸 사람으로 비춰져서 몹시 기분이 나빴다. 정연이는 내가 아니면 남의 시선 따위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주의같았지만, 난 그렇지를 못해서, 좀 더 있다가라는 정연이를 그냥 두고 집으로 왔다. 처음에는 기분이 나쁘다고 생각했었지만, 생각해보니 뭐, 그다지 기분이 나쁠 일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스물 둘의 신선한 여체를 품어봤다고 생각하면 내가 손해본 일은 없었던 것이다. 하다 못한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경찰에까지 끌려간 허무한 눈빛의 그 녀석을 생각하면 내 처지는 행복에 겨운 꼴이었던 것이다. 오는 길에 마트에 들렀는데, 옥수수를 어디서 파는 지 찾지 못해서 그냥 김밥만 하나 사와서 먹고는 일찌감치 침대에 누웠다. 어쨌거나 긴장을 푸는 행동을 했다가 또 경찰 때문에 긴장해서 그런지 피곤했고, 노곤한만큼 잠도 쉽게 들었다. 미연이가 찾아올까 했지만, 정연이 쪽에서 전화를 한 건지 찾아오지 않고 난 모처럼 10시간이 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출근을 해서 보니, 출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팀장도 경희씨도 오지 않았다. 사무실 전화가 울려서 받았더니 팀장이었다. 어제 하루 출장예정이었는데, 일이 좀 늦어져서 오늘까지 출장을 해야 한다고 했고, 오늘 밤이 되서나 서울에 도착할 것 같으니, 자기 작가들 스케쥴 관리를 부탁한다고 해서 그러마 했다. 난 어제 사장님께 구두로 허락을 맡았던 철기산의 일을 이야기했는데, 기획안을 쓰고 있는 도중에 사장이 봐서 이야기 했다는 내 말에도 회사에는 계통이 있으니 사장님께 직보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을 해서 좀 곤란했다. 경희씨는 단순히 늦잠이었는데, 어제 작가랑 만나서 늦게까지 술을 마시다보니, 깨어보니 좀 늦었다고 변명했다. 난 팀장이 없으니 괜찮다는 말을 하면서 숙취해소 음료같은 거라도 하나 사먹고 오라고 경희씨를 보냈다. 인터넷의 골든베스트에 오른 글을 하나 찍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프린트해서 읽었는데, 그저 평범할 뿐 비범함이 보이지 않았다. 워낙 많은 글을 읽다보니 그런 거겠지만, 역시 눈에 차는 글을 찾는 일은 쉬운 게 아니다. 난 서브 아이디로 소설 싸이트에 접속해서, 소설 하나를 올렸다. 처음에는 무인지도로 인해 전혀 인기가 없었지만, 조금씩 인기를 얻어가고 있는 소설이었다. 일을 하는 틈틈히 써서 올리는 거라 일주일에 두개가 고작이었는데, 올리고 나서 작가를 기다리고 있는데, 편집부의 인옥씨가 기획실로 찾아왔다. "경민씨, 전륜공녀 경민씨가 쓰는 거지?" "네?" "무슨 시치미야. 딱보니까 경민씨 스타일이던데. 그거 내거다. 그런데, 황보련은 죽이지 말지. 이번에도 정희씨면 나 경민씨 안본다." 인옥씨는 편집부에서 제일 오래 일한 베테랑인데, 내가 쓴 소설이라면 정말 어떤 거든 모두 알고 있는 여자다. 심지어는 내가 번지점프를 하다의 시나리오 작가 고은님의 팬까페에 올렸던 고리짝의 글들까지도 모두 읽어서, 예전의 내 여자친구관계까지 꼬치꼬치 묻곤 하는 정말로 내 골수팬이었다. 2년전쯤에 출판했던 내 마지막 소설의 편집을 그 때 신입사원이었던 정희씨가 맡은 것을 가지고 지금도 내게 땍땍거렸는데, 그 편집일도 실제로는 내가 맡긴 것이 아니라, 편집팀장이 신입사원인 정희씨의 일을 줄여주기 위해, 맞춤법이라던가 문장의 호응관계라던가 거의 고칠게 없는 내 글을 정희씨에게 배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이번에는 힌트라곤 하나도 없었는데, 단박에 내가 쓴 글이라는 걸 알아보다니, 대단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작가군들 중 몇 없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선태 형과 작품이야기를 좀 하고, 팀장 관리의 작가 군들에게 하나하나 전화를 걸어, 작품의 진행상황을 묻고, 마감의 시기를 조율한 후 에이포 용지로 프린트해서 정리해서 팀장의 책상에 놓아뒀는데, 의외로 작가들 중 나와 작업을 하길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최근의 내가 손댄 작품들 중 크게 히트 한 작품들이 있고, 그 중에선 정말로 꾸준히 책은 냈지만, 히트작이라곤 전혀 없었던 태훈이 형 같은 경우도 있어서 그런 듯 했다. 내가 전화를 하자 반색하던 작가들에게 팀장이 출장을 가서 대신 전화를 하는 거라는 것을 말했고, 그 중 몇과는 술약속을 잡았다. 결혼식이 있는 선태 형이 점심을 먹지 않고 일어나서 난 점심이 떴는데, 경희씨 쪽을 봤더니, 우리 업계에서 3초만 이야기하면 화가 나는 남자로 유명한 테리우스 작가에게 땀을 빼면서 뭔가를 계속 설명하고 있었다. 테리우스는 자기 잘난 척이 유난히 심한 사람이었다. 키도 크고, 얼굴도 잘 생겼으며, 집도 부자인 그가 잘난 것은 사실이기도 했다. 하지만, 거의 1분에 한 번꼴로 자기 자랑과 함께 상대방을 무시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에 누구도 그와 대화하기를 꺼렸다. 그가 내는 책마다 중박 이상을 내는 착실한 스테디 작가가 아니었다면 회사에서 당연히 잘라버렸겠지만, 어쨌거나 회사에 수익을 내주는 몇 안되는 중견 작가라서 그럴 수도 없고, 작품회의는 누구라도 해야 해서, 결국 막내인 경희씨가 맡고 있는 것이다. 얼굴이 두껍고, 누구에게도 비위를 잘 맞추는 나도 테리우스 작가의 잘난 척은 견디기 어려웠다. 그는 기획팀과 거의 식사를 하지 않아서 난 그가 회의를 마치면, 경희씨와 밥을 먹을 생각이었는데 -물론, 선태형과 회의를 하는 날이었기 때문에 법인카드를 사용할 예정이었다. -웬일로 가지 않더니 기다리는 나를 발견하고서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경민이 형, 밥 먹으러 가요. 내가 살게. 형들이야 뭐 돈이 있나. 오랜만에 내가 목에 때좀 벗겨주지 뭐. 경희씨도 준비하고요." 전혀 반갑지 않았지만, 그래도 중요작가라서 무시할 수도 없고 해서, 그를 따라 나섰다. 이름도 모르는 외제차가 회사 주차장에 서 있었다. 다행인 것은 2인승이어서 나는 내 차로 이동할 수 있었는데, 왠일인지 이 인간이 내 차에 타는 것이었다. "아휴, 형, 세차 좀 해라. 돈을 아무리 못 벌어도 그렇지. 이게 뭐냐. 손세차 오천원이면 하는데. 어, 경희씨는 뒤에 타요." "니 차는?" "내 차는 이인승이니까. 셋이서 못 타잖아. 어디 갈까? 63빌딩 갈까? 거기 부페 좋은데. 가난한 사람들이야 부페면 최고니까." "그러자, 네가 사는 건데. 부페 한 번 먹지 뭐." "형, 촌스럽게 한 다섯번 이렇게 가지는 마." "알았어. 경희씨도 괜찮죠?" "네. 선배님. 선배님. 말씀 드릴 게 있는데요." "뭔데요?" "테리우스 작가님이 이번 작품을 선배님이랑 한 번 해보고 싶다고 해서요. 새로 기획하고 있는 게 있는데, 선배님이랑 잘 통할 작품이라고요." "어떤 건데요? 그런데, 우리끼리 이야기 한다고 되나. 담당 교체야 윗 선에서 결정하는 거지. 우리같은 말단끼리 이야기 한다고 해서 통하는 게 아니잖아요." "형은 그런데, 왜 경희씨에게 존댓말을 해? 안 불편해? 나이 차이도 꽤 나잖아. 한 여섯 살 나나?" "팀장이 나한테 존댓말을 쓰잖아. 경희씨한테도 그렇고. 윗대라기 따라가는 거지. 별 의미는 없다." "둘끼리라도 터. 불편하게 그게 뭐냐? 이번 소설이 뭐냐면, 복수 이야기에다가 여자 꼬시는 이야기를 믹스할 거란 말이지. 둘 다 형 특기잖아. 여자 꼬시는 것도 그렇고, 복수하는 것도 그렇고. 그래서 형이랑 한 번 했으면 싶어서, 형도 알지. 권재인이라고. 걔랑 나랑 나이가 같잖아. 판매부수도 거의 비슷할 걸. 그런데, 걔가 출판사 옮겨서 이번에 8천부 계약을 했다고 해서. 내가 밀릴 수가 없잖아. 이 테리우스가." "내가 들었는데, 3부부터 보장이 아예 없대. 100권 나가면 80만원 받는 거야. 그럴리야 없겠지만. 넌 우리 회사에서 망해도 보장을 해주잖아. 하긴, 넌 망한 적은 없구나." "그래. 믿고보는 테리우스 아니야. 어, 형, 일차선으로 들어가. 차가 좀 꼬져도 운전으로 극복을 좀 해보라고. 아, 내 차 같으면 그냥 스르륵인데. 아 내가 이야기했나. 내차 100까지 7초밖에 안 걸린다. 경춘가도에서 한 번 땡겼는데, 진짜로 7초만에 올라가더라. 역시 자동차는 독일이야. 그렇지?"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기 차 자랑을 늘어놓은 테리우스에게 담당 교체는 내 권한이 없으니까 내일 팀장이 올라오면 보고해보겠다는 말을 했다. 부페는 휘황했다. 언젠가 어느 tv예능 프로그램에서 촬영한 걸 본적은 있지만 직접 먹어 본 적은 처음이어서 난 소신대로 비싸보이는 것 위주로 골랐고, 의외로 테리우스는 탕수육만 잔뜩 가져오는 것이었다. "왠 탕수육이냐?" "응, 여기 탕수육 맛있거든. 난 탕수육 먹으러 한 번씩 오니까. 아 저기 칠리새우도 맛있어. 형, 이따가 그거 가져다 먹어라. 다른 건 별로야. 하긴 형처럼 가난한 사람들은 이런 데 오기 힘드니까 이것저것 먹어보는 것도 괜찮긴 하겠다. 아니다. 내가 나랑 작업하면 자주 데리고 와 줄게." 나와 비슷하게 이것저것을 담아온 경희씨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경희씨의 접시를 본 테리우스가 와 진짜 똑같다라면서 나와 경희씨를 동시에 비웃었는데, 악의라곤 하나도 없는 그의 태생적 가벼움은 실로 짜증을 불렀다. 경희씨가 입맛이 떨어진 듯, 스테이크를 작게 썰어먹더니 테리우스에게 물었다. "그런데, 작가님. 아까 그건 무슨 소리에요. 선배님이 복수와 여자꼬시기의 전문가라니. 제가 여기 입사하기전에 선배님 쓴 소설을 모두 읽었는데, 그런 건 없던데요." "아하, 그런게 아니고, 실전 전문가라고요. 저렇게 순진하게 생겨가지고, 여자 꼬시는 거 완전 전문이거든요. 몰랐죠?" "그 이야기는 그만하지. 옛날 이야기잖아." "뭘, 잘하는 건 칭찬해줘야지. 진짜 대단해요. 무슨 멘트귀신이 달라붙은 것도 아닌데, 여자들 마음을 순식간에 잡는다니까요. 형, 그 때 걔 있잖아. 우리가 강남에서 작업했던 애. 걔 드라마 나오더라. 봤어?" "응? 누구?" "왜 칼리에서 내가 좋아하다가 형한테 뻑가서 내가 차버린 여자애 있잖아. 걔 이름이 뭐였더라. 사라였나. 형이 그 꽃길 만들어줬던 그 여자." "아, 민영이. 걔가 데뷔했어?" "어. 나도 좀 알아보려고 칼리 새끼마담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니까 형 룸싸롱 끊고, 한달도 안돼서 그만 뒀대. 한 2년 됐지. 우리가 거기 다니던게?" "선배님. 룸싸롱도 다니세요?" 경희씨가 믿을 사람 없다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난 황급히 대답했다. "아뇨. 그 때 테리우스 작업중이었는데, 회의를 룸싸롱에서 많이 했거든요. 우리 월급 빤한 거 아시잖아요. 우리 월급으로 무슨 룸싸롱을 다녀요." "왜 그래. 내숭 원단이네. 완전히. 형은 커피 마시러도 가고 그랬잖아. 애들이랑 밥도 먹고. 돈도 별로 안들었을 걸. 한 번 다니는데. 그러니까 나랑 이번에 콤비를 짜서 한 번 대박을 내고. 내가 재판 찍으면 그 인세는 형 다 줄테니까. 그걸로 새로운데 가보자고. 일산쪽에 물 죽이는 데가 있다고 하더라. 신고식부터 그냥 홀딱쑈를 한대. 보통 그러면 여자들이 별로잖아. 왜 하드하게 놀면 아무래도 여자애들이 다 고졸이고 그렇잖아. 그런데, 거긴 전원 4년제 대학생들이래. 거기다가 특별요금을 내면...." 꽤나 여권주의자인 경희씨가 참기 힘들다는 얼굴을 했다. 난 얼른 테리우스의 입을 틀어막고, 경희씨에게 사과했다. 경희씨는 혐오식품이나 성범죄자를 보는 눈길로 나를 쳐다봤는데, 그건 경희씨의 입사이후 내가 처음 본 눈빛이었다. 이미지를 쌓는데는 시간이 오래 걸려도, 잃는데는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는 건 만고의 진리였다. 걔 이름이 유민영이었나. 예쁘긴 했는데, 드라마에 나온다고. 난 돌아가는 대로 인터넷을 뒤져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뭐 다시 연락을 한다거나 하려고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호기심이었다. 점심을 먹고 테리우스가 제 차로 돌아가는 걸 보고서 난 우리 회사 앞의 까페 수로 경희씨를 데려갔다. 경희씨는 마뜩치 않은 표정이었는데, 선배인 내가 사정하니 어쩔 수 없이 따라온다는 투였다. "경희씨 거기 앉아요. 아이스 아메리카노죠? 시럽 없이." "아뇨. 오늘은 좀 비싼 걸로 먹을래요. 비엔나 커피로 사주세요. 열이 나서 단게 먹고 싶어요." "그러죠." 주문을 하고 돌아와서 경희씨에게 다시 한 번 사과했다. "아까 기분 나빴죠?" "전, 전 말이죠. 선배님은 다른 사람이랑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누구보다 여자를 위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처음 입사하고 나서 한달 쯤 지났나 옥상에서 담배피다 선배님께 걸렸을 때요. 선배님이 담배를 한 대 달라하시더니 입담배를 피우면서 저한테 뭐라고 하셨는지 기억하세요?" "내가 뭐라고 했어요?" "내가 선배인데, 담배도 못피워서 미안하다고요. 그러면서 그 다음날 제가 피는 담배랑 똑같은 걸 한 보루 사주셨거든요. 여자가 무슨 담배야 라던가, 건강에 좋지 못하니까 끊어라던가 그런 말을 하지 않는 선배나 어른은 처음이었어요. 진심으로 존경했어요. 그런데, 선배님이 그럴 줄은 진짜로 몰랐어요." "룸싸롱에 다닌 건 사실이에요. 테리우스 핑계를 댔지만, 그 때는 좋았어요. 나도 남잔데, 예쁜 여자들이랑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건데 왜 싫었겠어요. 그런데, 아까 이야기 나왔던 사라 때문에 룸싸롱을 그만뒀죠." "그 연예인이라는 여자요. 선배님을 좋아했다는."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냥 여름에 갔다가 술이 취해서 사라가 잔을 엎질렀거든요. 술이 쏟아지는데 급해서 내가 팔로 막았어요. 난 반팔 와이셔츠 차림이었으니까 그냥 막은 거였거든요. 팔이야 씻으면 되니까. 그러면서 내가 쏟은 것처럼 해줬죠. 술집에서 여자가 그런 잘못을 저지르면 이상한 걸로 갚아야 하니까." "이상한 거 뭐요?" "옷을 벗거나 뭐 그런 거요. 그 때 사라는 브래지어랑 팬티만 입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울것 같은 얼굴이었거든요." "술집여자들이잖아요." "술집 여자들도 여자잖아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앞인데, 다른 사람들 있는 중에 옷을 벗는 게 좋을 리가 없잖아요. 그 때 사라는 테리우스를 좋아하고 있었거든요. 그 뒤로 친해졌어요. 그러다가 나도 좋아졌죠. 그런데, 솔직하게 술집여자랑 여생을 도모하지는 못하겠더라고요. 그것도 그 때 친하다면 친했던 동생인 테리우스랑 잔 여자랑 어떻게 살겠다고 나서겠어요. 그 뒤로 술집에 발길을 끊었죠. 사라에게 상처를 많이 줬죠." 여자는 감정의 동물이다. 경희씨는 이미 내 이야기에 홀딱 빠져들어서, 나온 커피는 마실 생각도 하지 않고, 그 당시에 대해 물었다. 사라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내 결정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참이나 나누고서 회사로 돌아왔을 땐, 이미 다시 나를 존경하는 눈길로 바뀌어있었다. 작가미팅을 한 번 더 하고, 내 담당 작가들에게 문자 메세지를 하나씩 보낸 다음 퇴근 준비를 했다. 요 며칠 중 유일하게 잠을 푹 자고 와서 그런지 컨디션이 좋았다. 오늘은 집에 빨리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누구라도 만날까 해서 핸드폰을 뒤적거리는데, 경희씨가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더니, 내게 다가와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배님. 오늘 시간 어떠세요? 저번에 말씀 드렸던 우연희 작가요. 오늘 저녁에 시간된다는데요." "그래요. 술이나 한 잔 합시다. 밥을 먹을까요?" "작가님이 낸대요. 작가님 작업실로 가면 되요." "그럼 갑시다." 차에 타고서 신림동에 산다는 우 작가의 집을 찾았다. 맨손으로 갈 수 없어서 뭘 사갈까 하다가 내가 편의점에서 산 것은 위생천 한박스였다. 작가들은 대개가 불규칙한 생활을 하기 때문에, 속이 좋지 못한 경우가 많다. 소화제를 사는 나를 보고 경희씨는 역시 선배님은 남다르다면서 다시금 존경을 표했다. 우연희 작가는 나랑 동갑의 중견이라고 해도 좋을 작가였다. 여성특유의 섬세한 문체에 약간 bl을 가미한 첫소설과 후속작이 히트하면서 우리랑 계약을 했는데, 우리 회사랑 계약을 한 후에는 히트작이 없어서 이번 책이 굉장히 중요한 타이밍이긴 했다. 쓰는 것보다는 읽는 것을, 읽는 것보다도 남의 잘못을 잘 끄집어 내는 내게 경희씨는 상당한 기대를 표했는데, 내가 우 작가와 경희씨가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100페이지 정도 써놓은 분량을 읽어본 결과로는 이번 글은 히트치긴 어렵다는 것이었다. 물이 흐르는 거처럼 넘어가긴 했지만, 특이점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최근의 유행인 회귀물을 선택한 것은 좋았지만, 과거의 일을 이용해서 사업적으로 성공한다는 현대판타지의 공식 그대로를 차용했기 때문에 이미 신선함 따위라고는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글을 시작하고 있다보니 뭔가 고칠 점도 보이지 않았다. 꽃게까지 들어간 해물탕을 먹으면서 난 내 이런 감상을 전혀 여과없이 말했는데, 의외로 우작가는 쉽게 수긍을 했다. 그러면서 나를 찾은 건, 그 평범한 글에 뭔가 포인트가 될만한 것을 하나나 둘쯤 더해주길 바란다는 부탁을 했는데, 난 금방 생각나는 것이 없어서, 이틀 안으로 대답을 해 주기로 하고서는 숙제만 하나를 받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중간에 경희씨를 내려주고, 집으로 돌아오니 10시쯤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하루만 더 일하면 주말이어서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스포츠 뉴스를 좀 보다가 뜬금없이 욕조에 몸을 좀 담그고 싶어서 뜨거운 물을 받고 있는데, 테리우스에게서 전화가 왔다. "경민이형. 나 테린데. 대박!" "뭐가?" "형, 내가 뭘 찾았는 줄 알아. 우리 놀 때, 내가 찍어놓은 테이프가 있더라고. 왜 그 청평에서 놀때 말이야." "너, 그거 어쩌게." "어쩌기는. 한 번 더 놀았으면 하는 거지. 내가 뭐 그거 가지고 협박하고, 그러겠어. 내가 그럴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잖아. 사라는 형이 맡고, 난 사라가 불러주는 사라친구를 맡으면 되잖아. 그 때처럼 말이야. 물레방아나 그런 건 안하면 되지. 뭐, 그때도 그런 건 안했잖아. 나도 연예인이랑 한 번 해보고 싶다 그거지." "야, 그게 협박이지. 뭐가 협박이냐?" "아니야. 사라는 형이야기 하면 그냥 나올걸. 그 때 형이랑 좀 깊었잖아. 내가 왜 출판사에서 형한테만 형이라고 하는 줄 알아?" "그러고보니 그렇네. 왜 그런거야?" "형은 나 때문에 여자를 버렸잖아. 그 때 당시만 해도 내가 사라 여전히 마음에 있는 거 알고, 나를 버리지 못하니까 사라를 버린 거잖아. 미안했어. 그 때는 내 여자 뺏어갔다고 생각을 해서 그렇게 미안하지 않았는데, 형 아예 발 딱 끊고, 사라도 금방 가게 그만두는 거 보고 둘이 진심인데 나때문에 그만뒀구나 싶어서 미안했어. 그러니 이번엔 그냥 놀자고. 형은 옛날 좋았던 여자 만나고, 나는 나대로 연예인이랑 한 번 자보고. 좋잖아." "됐어. 그만 하자." "아냐. 나 형네 집으로 가고 있어. 내려와. 작전회의 해야지." "아니. 담에 보자. 주말쯤에. 나 내일 출근도 해야 하고. 너랑 다르게 난 서민이잖냐. 지금 목욕하려고 물도 받고 있는데." "그래? 그럼 나 잠깐 형네 들릴게. 줄 것도 있어." 한 5분쯤 시간이 지나니 초인종도 누르지 않고 테리우스가 들어왔다. 집이 좁은 듯 이리저리를 둘러보던 테리우스가 소파에 앉으면서 tv를 보며 말했다. "형, dvd는 볼 수 있지? 컴퓨터로 봐야해? dvd플레이어는 없어?" "어. 없는데. tv로 보려면 ps3로 보던가. 거기 넣으면 볼 수는 있을 걸." "리모컨은?" "따로 없지. 있긴 한데, 그거 옵션이라서 안 샀거든. 듀얼쇼크패드로 움직여서 보던가." "대박이다. 어떻게 이렇게 살아. 아, 형. 이거 배. 우리 집에 한 트럭이 왔더라. 먹어보니까 맛있길래 가져왔어." "잘 먹을게. 그리고 너 다음에 경희씨 보면 사과해라." "무슨 사과?" "걘 여자잖아. 당연히 룸싸롱 다니고 이런 거 별로로 생각하지. 아까 전에 너랑 나랑 술집 간 이야기 하는데, 나까지 쓰레기같이 보더라. 생전에 나한테 그런 얼굴 안하던 앤데." "어느 정도 성공했나. 내가 그 생각으로 그 이야기 한 거거든. 너무 선배님, 선배님 하길래." "원상복구했다." "와. 진짜. 왕이빨이야. 왕이빨." "됐고, dvd 빌려왔냐? 보고 있어라. 난 좀 씻고 나올테니까." "알았어." 부족하지 않게 벌면서 살지만, 혼자 살면서 과일을 챙겨먹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테리우스 자식이 들고 온 배니까 분명히 고급품일거고. 한동안은 입이 호강하겠다 싶어서 흐뭇한 마음으로 반신욕을 하는데, 녀석이 너무 조용했다. 절대로 이어폰을 끼거나 남을 배려해서 소리를 줄이거나 할 녀석이 아닌데. 괜히 마음이 급해져서 씻고 나왔더니 테리우스가 보고 있는 것은 그 찍었다는 비디오였다. 스물 아홉의 난 지금보다 살이 조금 더 말라있었고, 지금처럼 껑충하게 키가 큰 녀석의 옆에는 예쁘장한 여자가 들러붙어 있었다. 사라는 앞치마를 하고선 무슨 요리를 만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때의 일이 눈앞에 그린듯이 기억이 났다. 카레였다. 뷰용인가 뭔가 하여튼 야채국물을 이용해서 카레를 만들었었다. 해변에서나 입을 롱드레스를 입고, 환하게 웃는 사라는 예뻤다. 헤 입을 벌리고 웃고 있던 테리우스가 팬티만 입고 있는 나를 보며 말했다. "형, 예쁘다 그지?" "어. 나는 니가 무슨 포르노라도 찍었을까 해서 범죄자 만들기 싫어서 반대했다만, 저건 좋네." "카레 맛있었는데." "어, 그런데, 니 옆에 있던 저 여자는 누구냐? 왜 생각이 나질 않냐?" "가게이름은 숙향이었는데, 진짜 이름은 모르지. 청평 가기 전날 내 파트너였거든." "좋았는데. 진짜." "그러니까 한번 더 가자니까. 그런데 형, 물 좀. 목마르네." "어제 장봐서 맥주도 있어." "아니. 물. 나 내차 남에게 안 맡기잖아. 대리 운전 하는 애들이 언제 진짜 독일 스포츠카를 몰아봤겠어. 괜히 차 다치면 나만 손해지." 냉장고에서 500미리리터 생수를 하나 꺼내서 던져주고, 나도 하나를 꺼내서 마셨다. 초인종이 울려서 나갔더니 정연이와 미연이가 서 있었다. 문을 다 열지 않고, 살짝만 열었다. "웬일이냐?" "잠깐 놀러왔어요. 어제부로 정연이랑 사귀기로 했다며. 아저씨. 재주야. 늙어가지고 어린 여자 꼬여내서는. 완전 도둑. 뭐해요. 문 열어요. 혹시 안에 누구 있어요?" "어 손님있다." "혹시 여자? 한정연, 이 아저씨가 이런 아저씨라고. 너 다시 한 번 생각해. 괜히 손해다." "여자 아니고 남자다. 작가야. 테리우스라고." "풋. 뭐, 테리우스? 왜 자기가 테리우스처럼 생겨서?" 순간, 정연이의 눈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하긴, 나와는 다르게 테리우스는 활동을 유지하고 있는 현시대의 잘나가는 작가였으니까. 무협매니아인 정연이가 관심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미연이는 우격다짐으로 문을 열고서 거실로 들어가다가 진짜로 잘생긴 녀석이 들어오는 자기를 무시한 채 화면에 집중하고 있자, 자기도 모르게 tv화면으로 고개를 돌렸고 곧 크게 소리를 질렀다. "뭐야! 저거 유민영이야. 유민영. 애정의 계약에 나오는 그 유민영. 저건 아저씨고. 둘이 아는 사이였어. 어, 어..저거..." 무심히 tv를 보던 테리우스도, 호들갑스럽던 미연이도, 테리우스를 보고 있던 정연이도, 신발을 정리하고 문을 닫고 거실로 다가오던 나도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tv 화면엔 사라와 내가 진하게 키스를 나누고, 침대에 누워 서로의 옷을 하나씩 벗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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