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저랑은 전혀 딴 판이에요.”
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마음과 마음이 잇닿아 있는 것이 중요하죠.”
내가 입을 열었다.
“그냥 제 생각이에요.
처음엔 누구나 그 사람이 남기는 이미지에 취하게 되고,
그것보다 더하게 되는 것은 호감과 좋아하는 감정이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그 사람에 대해 자기자신이 빚어내는 이미지를 더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실제로 사귀고 같이 어울리면서부터는 자기자신이 만들어 냈던 그 이미지는 결국
실제의 그 사람과는 서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조금씩 실망도 느끼게 되고요….
그러기에 초심을 유지하는 마음가짐이 소중한 것 아닐까요?
처음에 좋아했던 그 마음....처음에 끌렸던 그 마음....
그런 초심을 유지하기는 힘들다 할지라도 그 때의 그 느낌을 적어도 기억해 낼수만 있다면
그 사랑에 조금이라도 더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녀는 몹시 마음이 끌리는 눈빛으로 내 눈을 마주 보며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자기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어떤 몇 마디의 말이라도 캐취하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나는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처음에는 외모를 중시하기도 하고, 어쩌면 자기자신에게 친절한 그 사람의 상냥함에 매료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단계에서 한발짝 더 넘어서게 되면, 무엇보다도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서로를 얼마나 감싸 줄 수 있고 함께 걸어나갈 수 있는 존재인지가 더 소중하게 느껴지겠죠.
어린아이의 감정에서 어른의 감정으로 업그레이드 되는 순간이죠.
그게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요? 전 그렇게 생각되네요.
남친이랑 서로 매우 다르다고 했는데, 서로 매우 다르기 때문에
어쩌면 더 좋은 사이를 유지할 수 있는지도 모르죠.
잘 생각해 본다면 서로에게 잘 맞는 부분이 있다는 걸 찾을 수 있을거에요.”
그녀는 내 눈을 바라보면서, 때로는 내 입술을 바라보면서 무척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어느 순간에는 눈빛이 약간 몽롱해지는 듯 하다가,
또 어느 순간에는 아주 약간 살짝 흐려지기도 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의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함께 떠올리면서
좋든 싫든 어떤 공명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정말 그러네요.....서로에게 어떻게 다가서는 존재인지....처음의 마음....그 소중한 순간들.....”
그녀는 혼자서 중얼거리면서 잠시 딴 생각을 하는 듯 했다.
그러더니 살짝 그녀의 눈빛이 흐려짐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사실 그녀에게 들려준 이야기들은 내가 비교적 순수했던 어린 시절에 깊이 사색해 봤던 결과물이다.
하지만 점점 자라게 되면서, 남녀관계는 결코 그렇게 순수하지만도 않으며,
이상적으로만 추구해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되었다.
어쩌면 호감이 가는 이 여승무원에게 들려주고 싶은 내 순수했던 한 단면일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그냥 넉살 좋은 말솜씨에 진지하고 부드러운 표정연기를 곁들여 그녀의 호감을 이끌어내려는
테크닉의 한가지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전술은 너무나도 잘 맞아떨어져, 그녀는 혼자서 중얼거릴 정도로 도취해 있는 것이다.
감수성이 아주 풍부한 애다.
이런 애들은 섹스할 때에도 여러가지 자극을 두루 느끼고 싶어한다.
호기심이 왕성하니까.
피곤함으로 가득했던 몸과 정신에 무료한 기내에서는 쉽게 듣기 힘든
그런 신선함이 느껴지는 이야기일 테니 상당히 빨려들어가고 있을 터였다.
“사실 혜미 씨도 이미 느꼈던가, 느끼고 있는 그런 감정들이겠죠. 아참, 미안!^^
기내에서 승무원 이름 부르는 것은 실례인데....”
그녀의 이름은 조혜미였다.
이미 유니폼의 명찰을 통해서 그녀의 이름을 캐취하고 있었다.
그녀가 살짝 수줍은 듯한 미소를 흘린다.
“저는 아직도 마냥 어린애 같죠...뭐....”
“흠.... 첨 이야기하는 사람한테 이런 말씀 드리면, 좀 우습고 낯설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아니에요, 말씀하세요.”
“이름 부를께요. 솔직히 혜미 씨랑 조금 전 이야기를 하다가 혜미 씨의 눈빛을 자세히 살폈어요,
저도 모르게 그만....”
그녀가 웃는다.
“네...”
“아, 사실 혜미 씨 눈이 무척 아름답기도 하고요, 더구나 그런 걸 두개나 갖고 계시니...”
“쿡쿡....!!”
넉살좋은 내 우스개 소리에 그녀가 순간 긴장이 풀어지면서 귀여운 보조개가 섞인 웃음을 터뜨린다.
이 단계에서는 한번쯤 더 긴장을 풀어주면서 웃겨줄 필요가 있으니.....
“바로 조금 전에 봤던 눈빛이라서 아주 쉽게 기억해 낼수가 있네요,
사실은 전 기억력이 나쁘거든요.....아....이런 난감..”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날 쳐다본다.
“흠흠....조금 전 혜미 씨 눈빛에서 제가 말씀드린
순수한 어린아이의 눈빛과 열의와 진지함이 가득 담긴 진지한 어른의 눈빛을 보았답니다.
혜미 씨도 두가지를 모두 가득 품고있는 멋진 분이세요.
항상 그 눈빛을 잃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그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기를
이 순간 찰나의 친구이자, 그냥 오빠로서 진심으로 바란답니다.”
진심이 가득 담긴듯한 정성어린 말투를 미소와 함께 담아보냈다.
그녀가 활짝 웃는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내 눈을 계속 마주 바라보고 있다.
잠시도 떼놓지 않고 말이다.
“네, 고마워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요....”
그녀 역시 진심이 가득 담긴 말투다.
“잠시 기내에서 스치는듯한 인연이지만, 저라는 승객에게 친절을 베풀어주신 승무원이고....
저에게 호감을 느끼게 해준 친구이고, 또 제가 호감을 갖게 된 여동생이기도 하고요. 감사 드려요.”
“아, 아니에요. 사실 제가 실수를 했었던 건데....
그래도 누군가에게 저도 호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무척 좋은걸요.”
그녀의 목소리와 표정은 모두 밝기만 하다.
“아뇨, 그건 전혀 그렇지 않아요.
사실 지난 적지않은 시간동안 이미 많은 남자들이 혜미 씨를 보면서 그렇게 느꼈을걸요?”
“헤헷....그럴리가...”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부끄러워한다.
“둔하기는....그런 사실조차도 조금도 느끼지 못하면서 서비스하느라 정신 없었구나?
타고난 승무원이라고 자랑 하는거니, 지금?”
“쿡쿡....!”
내 짖궂은 유머에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
이내 갑자기 약간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정말 감사드려요. 이렇게 짧은 시간동안 이렇게 많은 좋은 말씀들을 해주셨네요...
주위 분들이 무척 좋아하실 거에요, 여자친구 분은 너무 좋아하겠다....”
내가 살짝 토라진다.
“흠흠....일부러 사람 놀리시는것도 잘하시네요.”
“네?”
그녀의 눈이 일순간 동그래진다.
“말은 이렇게 청산유수같이 했어도.....전 여친 없어요.”
“네? 설마....?”
“내가 왜 너한테 거짓말 하니?”
살짝 말을 놓으며 맥이 빠진듯한 제스처를 짓는다.
“정말 없으세요? 와, 눈이 너무 높으신거 아니세요?”
“흠...들켜 버렸네....ㅋ 사실 농담이구여,
별로....친구들은 많은데 사람을 사겨 볼 기회나 시간이 별로 없었어요.
학교에서나 회사에서나 나름대로 바쁘게 지냈거든요.”
“아....!그러셨구나.....”
그녀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살짝 끄덕인다....
“좋은 남자는 모두 유부남이라더니....꼭 그런 것만도 아니네요.”
“헉! 내가 좋은 남자라구??”
“네!”
그녀가 웃지도 않고 단호하게 말한다.
쿡쿡 내가 웃음 지으며 장난기스럽게 말을 건넨다.
“속았구나?”
“속은거에요?”
“모르죠.”
“좋은 분인 것 같은데...”
“좋아요.”
“쿡쿡....!”
요년 요거 단단히 홀렸네....단순한 립서비스는 결코 아니다.
표정을 보면 아주 쉽게 알 수 있지.
“그렇지만 비극은 세상에 좋은 남자는 많다는거죠. ㅋ”
“그건 그렇죠, 그런데 많은데도 또 쉽게 보는건 아니잖아요.”
“아, 그건 또 그렇다....오늘 우린 성공했군요.”
“성공했네요.”
“바깥이었고 사람들만 없으면 하이파이브 한번 하는건데....”
내 말에 그녀가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아차!싶어서 내가 얼른 말을 돌린다.
“아, 기분좋다, 정말 즐거운 대화였다 그쵸?”
“네.”
“미녀와 야수의 다얄로그.”
혜미가 또 웃음 짓는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혜미를 야수로 잘못 안다면 내가 용서치 않겠어!!”
“쿡쿡...!”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면서 말한다.
“천재시네요! 어떻게 그런 표현을 생각해 낼수가 있으세요?”
“책이라도 한권 내볼까요?”
“내 보세요.”
“독자 한사람은 얻었네. ㅋ”
내가 잠시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고 창밖을 내다본다.
그녀는 잠시 뒤를 흘깃 돌아보고 시계를 본다.
웃고 즐기는 사이에 어느덧 착륙시간은 다가오고 있다.
난 당연히 모든 것을 계산에 집어넣고 있었다.
내가 창에서 고개를 돌려 혜미에게 말을 건넨다.
“책 좋아한다고 했었죠?”
“네...”
“게을러져서 많이 안 읽게 되죠?”
“네....ㅋ”
그녀가 웃는다.
“요즘 많이 피곤한가 봐요. 승무원이란 직업이 또 그러니..."
“네, 조금....말씀드렸다시피....”
“가벼운 운동과 스트레칭으로 몸을 많이 풀어줘야 해요.
여성들은 특히 허리와 어깨, 목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해요.
어머니들 연세들어서 고생하시는 것 보면...”
“네, 맞아요, 저희들도 그게 걱정이에요.”
“그러니까 오빠가 시키는대로....운동, 스트레칭...ok?”
“쿡쿡....! 네...”
“거기에 좋은 책이라도 읽으면서 뭔가에 집중하면 많이 좋아져요.”
“네....그럴께요.”
“잠시만....”
내가 몸을 일으켜 가방을 꺼내려 한다.
그녀가 급히 일어서며 진지하게 말한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뇨..”
가방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가방을 열고 수필집을 한 권 꺼내들었다.
나는 다 읽은 것이다.
나는 물건을 소중히 다루는 편이다.
그래서 읽은 책도 매우 깨끗하다.
내용은?.
흠, 볼만은 하다. 하지만 내가 꼭 좋아하는 장르는 아니다.
하지만 포인트는?
여자들이 좋아할만한 글이 많았다.
“요즘 제가 읽고 있는 책....읽어 주세요. 재미있고 좋아요. 도움이 될 거에요.”
“아....! 흠....”
“살짝 챙겨놓으세요. 괜찮아요, 그런데 저도 아직 다 읽진 않았어요.
읽고 저한테 돌려주셨으면 하는 바램이 있네....”
“아, 돌려달라고요?”
“넵. 절대로 이상하게 듣진 마세요.”
“네.....”
“솔직히 혜미 씨랑 다음에 또 이야기 해보고 싶어요. 오해는 마세요. 순수한 제안이니까요.
퀵턴이잖아요?”
“네....”
“전 홍콩에서 중국 들어갔다가 이틀 후에 다시 귀국해요.
혜미 씨는 오늘 서울 돌아가서 쉬고 스케줄이 어찌 될는지 전 모르죠.
하지만 혜미 씨는 알고 있겠죠, 자기 스케줄이니까^^
그냥 틈틈이 이 책을 읽으세요. 그냥 아무런 부담 없이 그렇게요.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저에게 돌려주세요.
그런 기회를 얻었으면 하네요.
따뜻한 커피에 치즈케잌이라도 살짝 나누면서
서울에서 다시한번 부담없이 좋은 느낌 가져보고 싶은게 솔직한 제 바람이에요.
무례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전 지금 이 말씀 드리지 않으면,
제 조그만 바람을 전달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요. 그리고 아쉬움도 아주 클거 같고요.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해주세요.”
나는 그녀가 숨 돌릴 틈을 주지 않고, 바로 수첩을 꺼내어 한장을 곱게 찢었다.
그리고 그 위에 이름과 핸드폰 번호와 회사이름, 회사전화번호를 간단히 적었다.
대기업에 다니긴 한다...
하지만 중요한게 한가지 더 있다.
나는 글씨를 예쁘게 잘 쓴다.
군대에서도 고참들의 연애편지는 내가 거의 대신 써 주었다.
여자들은 글씨 잘 쓰는 남자를 보면 그 사람을 다시 보게 될만큼 영향을 많이 받는다.
혜미도 내 글씨를 유심히 바라보며, 미소짓는다.
그리고 그것을 책갈피 사이에 끼웠다.
“명함 같은거 건네지 않겠어요. 그런 의도가 아니니까요.
그냥 책을 친구한테서 빌려 읽고 친구한테 돌려주는 것 뿐이에요. “야, 책 잼나더라”하는 식으로요.^^”
이 글을 읽고, 혹시나 기내에서 여승무원에게 명함을 쉽사리 건네거나 하진 마시라.
승무원들은 기내에서 이미 대부분의 명함을 버리게 된다.
사람들이 흔히 수근거리는 혹시나 하고 기대하는 그런 일은 실제로는 거의 없다.
그리고 그녀에게 책을 건넸다.
그녀는 책을 받아들었다.
아주 짧은 순간에 아주 순식간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행동인지라,
그녀는 따로 자세히 생각할 틈이 없다.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이 모든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녀가 잠시 책의 제목을 읽었다.
“아직 못읽어 본 거네요....제목은 알아요....”
솔직할 때는 솔직한 애다.
여자들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녀가 일어서며 말한다.
“고맙습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 살짝 다른 승객들을 쳐다본다.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 승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승무원들의 공간인 갤리로 걸어 들어간다.
책을 갖다놓으러 가는 것이다.
절대로 내버리지 않는다.
나는 여유있는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늘씬하고 섹시한 뒷모습을 아래 위로 훑고 있었다.
"이쁜 것, 서울에서 섹스를 나누자."
나의 들리지 않는 중얼거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