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나는 나의 소꿉친구로 사는 집이 우리 집과도 가까워 유치원에 다니기 전부터 함께 놀던 시절이 있었다. 어떻게 된 인연인지 유치원은 물론 초, 중,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나왔다. 어릴 때는 같이 노는 시간이 많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우리 각자도 성장하며 점점 서로의 사이가 멀어졌다. 나는 찐따로서 계속 주가가 떨어졌고, 세나는 여자들이 부러워할 만한 미모와 아직 학생이라 보기에는 믿어지지 않을 쭉빵한 몸매를 가진 성숙한 여자로 자라며 많은 학생들에게 둘러싸이는 인기인이 되었다. 덧붙여 말하자면 세나는 재벌 집의 딸이다. 이렇게나 차이가 많이 나는 남녀가 고작 소꿉친구라는 인연 하나만으로는 오늘날까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올 수는 없었다. 나 역시 나에게 상처를 입히면서까지 무리하게 세나와 친하게 지내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튼 한동안 머릿속에서 지우고 있던 세나가 지금 엑스의 문자를 통해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세나와 간접 키스를? 그것도 내가? 아니, 어떻게 하면 교내 최악의 찐따와 최고의 인기인이 간접 키스를 할 수 있냐고요. 그야, 뭐 진짜 키스에 비하면 훨씬 난이도가 낮겠지만 방법이 쉽게 떠오르질 않는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결론부터 말하면 세나의 입에 닿은지 10분도 안 된 물건을 내 입술에 닿게 하면 그걸로 끝이라는 얘기잖아. 사람이 입에 대는 것이라 한다면 뭐가 있지? 음식물, 칫솔, 립스틱, 립밤 등등이 있지만 이것들을 세나의 입술이 닿은지 10분 안에 어떻게 구하냐는 것이다. 세나가 립밤을 바르는 것은 학교에서도 본 적이 있지만 그건 소지하고 다니는 물건인지라 내가 손에 넣기는 어렵다. 립스틱은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학교에서 쓰는 건 본 적이 없고. 세나가 학교에서 쓰는 칫솔도 쓰지 않을 때는 자물쇠로 걸어둔 사물함 안에 있기 때문에 얻는 것은 힘들다. 그렇다면 가장 가능성이 있는 건 음식물? 세나가 사용한 수저라거나 다 마신 캔, 빨대. 이거라면 어떻게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 학교는 급식제니 세나가 사용한 수저는 늘 급식소에 있겠지만 많은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그걸 어떻게 챙겨? 이건 기각하자. 역시 다 마신 캔이나 빨대 같은 게 가장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세나는 나와 같은 반이다. 정규 수업 4교시까지는 세나를 유심히 관찰할 수 있다. 내가 명령문을 받은 시간은 1교시와 2교시 사이에 있는 쉬는 시간이다. 그리고 지금은 2교시 수업에 접어들었다. 어차피 수업 시간에는 딴 짓을 못하니 중요한 것은 앞으로 있을 2교시 후의 쉬는 시간과 3교시 후에 있을 쉬는 시간이다. 4교시가 끝나고 나면 정규 수업은 그걸로 끝. 세나는 전공 수업으로 갈 테니 보기가 더 힘들어진다. 주어진 두 번의 그 쉬는 시간 안에 어떻게든 세나의 입이 닿은 물건을 얻지 못하면 더는 기회가 없다. 쉬는 시간이 되면 일진들은 담배를 피러 화장실에 가지만 정말 유감스럽게도 세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피부가 상하면 안 된다나 뭐라나. 뭐, 세나가 담배를 피운다고 해도 내가 그 꽁초를 손에 넣기도 좀 가능성이 희박하지. 기본적으로 일진들은 여러 명이 모여서 담배를 피우고, 일진이 아닌 학생들은 웬만하면 그런 자리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 곁에 있으면 뭘 꼬라봐 라는 소리를 지껄이며 시비를 거는 건 정해진 패턴. 괜히 삥뜯기거나 찍히기라도 할까봐 피하는 것이지. 일진들이 물러간 뒤의 흡연 장소에 간들 세나의 입이 닿은 담배 꽁초를 어떻게 찾으라고. 세나의 입이 닿은 건지 분간이 그나마 쉬운 건 세나가 먹다 버린 음료수 캔이나 음료수를 마실 때 쓴 빨대 정도가 유력하다. 난 초조하게 앉아 세나가 언제 음료수를 마시나 지켜봤지만 여자애들과 깔깔거리며 수다나 떨 뿐 뭔가를 입에 대지는 않았다.
"제발 뭐라도 좋으니까 마시란 말이야!"
그렇게 몇 번을 속으로 외쳤는지 우려했던 대로 아무것도 없이 4교시 마저 다 끝나 버렸다. 젠장! 이제 세나와의 거리는 더더욱 멀어지게 된다. 세나는 리듬체조부의 부원이다. 세나가 오후 내내 부활동을 하고 있으면 일이 더 어려워지는 거잖아.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못 건지고 그냥 돌아왔다?"
경민이와 만나 일의 상황을 보고한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턱을 매만지며 곰곰이 생각하던 경민이는 뭔가가 떠오른 듯 보였다.
"어쩌면 부활동을 하는 지금이 더 가능성이 있을지 몰라."
"무슨 소리야?"
"거긴 몸을 움직이는 체육부잖아. 우리 같은 부에 비해 수분 보충을 할 일이 더 많다는 거지."
"뭘 마신다고 해도 그 안에서 할 텐데. 내가 무슨 재주로 그 안까지 들어가?"
"누가 당당히 들어가랬냐? 당연히 몰래 숨어 들어가야지."
아항!
근데 숨어든다고 안 들킬 수는 있나? 하지만 경민이의 말이 옳다. 이대로 방과후 시간이 되면 기회는 사실상 깨끗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결심을 한 나는 경민이와 함께 결국 체조부가 활동하는 체육관 앞까지 왔다.
"좋아. 가자."
"너 혼자 다녀와."
"같이 안 가?"
"난 망 봐야지."
그냥 들어가기 싫어서 그런 것 같은데. 이 의리없는 새끼. 그래, 여기까지 와 준 것만 해도 고맙다. 나는 당당히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뒷문을 통해 몰래 들어갔다. 안에서는 반주 음악이 들렸다. 한창 활동 중이구나. 세나는 어딨는 거지? 다른 애들도 꽤 있었지만 세나가 생각보다 빨리 눈에 들어왔다. 팔이 흘러내릴 듯 어깨가 거의 다 들어난 헐렁한 반팔 티로 안에 입고 있는 검은색 런닝이 보이는 차림에 착 달라붙는 검은색 스판형 바지를 입은 약간 불그스름한 머리카락의 여학생. 타이트하게 줄인 교복은 분명 눈을 떼지 못할 수준이지만 저 차림도 이목을 끌기에는 만만치 않다. 쟨 대체 소화해내지 못하는 복장이 뭔지 궁금하다. 마침 그녀가 페트병에 든 음료수를 집어 들이키고 있었다. 그래, 저거야! 저걸 어떻게든 얻어야 돼. 웬만하면 쟤들이 돌아간 뒤 다 먹고 버려진 페트병을 줍는 게 안전하겠지만 명령문에는 세나의 입이 닿은지 10분이 지나지 않은 것에 한해서라고 했다. 그러니 기다린다는 선택지는 없다. 음료수를 얼마 정도 남긴 세나는 뚜껑을 닫고 페트병을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저걸 어떻게 손에 넣지? 차라리 그냥 이대로 강행 돌파를 해버릴까? 전속력으로 달려서 페트병을 집은 뒤 정문으로 달아나면 어떨까? 나중에 추궁은 받겠지만 내가 무슨 의도로 그랬는지까지는 정확히 모를 것이다. 이상한 놈 취급받는다고 해도 지금은 정공법으로 나가는 게 최선책일지도......
쨍그랑!
갑자기 체육관 창문이 깨졌다. 그 바람에 여자애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뭐지? 어디 야구공이라도 날아왔나?
쨍그랑!
한 번으로 끝이 아니었다.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밖에서 돌 같은 걸 던지며 유리로 된 문을 차례차례로 깨고 있었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밖에서 소리가 들린다. 누가 돌 던지다 밖에 있는 쌤한테 딱 걸렸구나. 체조부원들도 쉬다 말고 소란스러운 밖을 내다봤다. 그 순간 나는 천우신조와도 같은 기회를 볼 수 있었다. 세나의 페트병은 무방비 상태였고, 애들의 시선은 다른 곳으로 쏠려 있다. 지금이야!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어! 난 나조차도 믿기지 않을 만큼 재빠르면서도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게끔 움직여 세나의 페트병을 집은 다음 얼른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하아! 하아!"
체육관을 나온 나는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격한 숨을 몰아쉬었다.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다. 나는 뚜껑을 열어 페트병의 입구에 입을 가져다 댔다.
드르르!
바지를 통해 휴대폰 진동이 전해진다. 클리어라는 확인 문자를 받은 나는 비로소 안심한 뒤 체육관 벽에 기대며 축 늘어졌다.
"살았다....."
살았다고, 살았어. 지금은 기운이 쭉 빠졌지만 힘이 남아 있었으면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싶을 만큼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근데 오랫동안 그 느낌을 만끽하며 여운에 잠기지는 못했다. 체육관 정문 부근이 아무래도 시끌시끌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누가 체육관 유리 문을 죄다 깨뜨렸지.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그랬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건데 대체 누가 그런 해괴한 짓을 한 거지? 몰래 숨어서 정문 쪽을 바라본 나는 깜짝 놀랐다. 경민이가 체육 선생의 손에 의해 귀를 잡혀 끌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상황을 미루어 보아 아까 밖에서 돌을 던진 건 경민이었던 모양이다. 일부러 시선을 그쪽으로 쏠리도록 만들어 내가 페트병을 훔치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
"경민이, 저 새끼가......"
난 널 의리없는 놈이라며 궁시렁거리기나 했는데 날 도와 주기 위해서 스스로를 희생하다니. 평소 큰 사고 한 번 안 치던 놈이 일부러 유리문을 깨뜨리는 데에 얼마나 각오가 필요했을지 짐작도 안 간다.
"씨발! 내 절대 이 은혜 안 잊는다."
교무실에서 한참을 꾸지람을 듣다가 돌아온 경민이에게 어떻게 됐냐며 물었더니 결국 깽값 부담은 순전히 경민이가 해야 했기 때문에 전화로 부모님께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내 생에 이렇게나 남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다. 난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지만 경민이는 전혀 개의치 않아하는 모습으로 쿨하게 대답했다.
"엑스의 명령은 클리어한 거지?"
"응......"
"내가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실패했다고 말했으면 실컷 두들겨 주려고 했는데 그렇다면 됐어."
"경민아......"
넌 정말 상남자 중의 상남자야. 내가 감동하자 경민이는 징그럽다며 날 밀어냈다.
"멋대로 미화하지 마. 어차피 네가 명령을 수행하지 못해서 죽으면 그 다음 차례는 내가 될 가능성이 크니까 도와준 것 뿐이야."
에이, 일부러 츤츤거리긴. 경민이는 팔짱을 끼더니 심각한 어투로 말했다.
"하지만 이대로 막연하게 명령을 따르기만 해서 될 일은 아닌 것 같아. 어차피 네가 죽을 때까지 엑스의 명령은 멈추지 않겠지. 살 방법을 따로 찾아야 돼. 최소한 엑스가 누군지 알 수만 있다면......"
"윤곽도 잡히지 않는 엑스를 우리가 무슨 수로?"
현준이와 태원이, 종훈이가 죽었을 때도 경찰은 그 세 번의 사건 모두 타살의 여지를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주도면밀한 녀석이 과연 우리 손에 잡힐까?
"애초에 말이야. 엑스는 왜 우리를 표적으로 삼았을까?"
"그, 글쎄......"
그러고 보니 엑스의 명령을 따르는 데만 급급하고, 세 친구의 죽음으로 정신이 없어서 그 부분을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어쩌면 엑스는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원한을 갖고 있는 사람일지도 몰라. 우리에게 하는 방식도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식이잖아."
"그거야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딱히 짚이는 것이 없다. 남에게 목숨을 위협받을 정도의 원한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데도 떠오르는 게 전혀 없다. 경민이 역시 그 부분은 나랑 똑같았다.
"그래도 생각해내야 돼. 우리 다섯 명이 공통적으로 가졌던 인간 관계 중에 정말로 엑스가 있을지도 몰라."
"글쎄. 별로 인간 관계를 쌓아놓지 않아서 솔직히 생각할 것도 없는데."
"내 말은 오랫동안 쌓은 관계가 아니라 잠깐 스쳤던 관계라도 생각하잔 말이야."
"그렇게 따지면 이 학교의 모든 교사들하고 학생들을 의심해야 될걸."
어디 이 학교 뿐이겠는가? 우리가 나온 중학교까지도 그 대상이 된다. 근데 학교 안에 그런 인물이 있을까? 내 입으로 말하기 민망하지만 우리 그룹은 늘 당하는 입장이었기에 때문에 오히려 우리야말로 일진들에게 죽일 만큼의 원한을 갖는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반대로 말하면 날 괴롭혔던 자들 중에는 없다는 뜻도 되나? 그렇다 해도 학생들 수가 얼만데 그 정도로 용의자를 좁혀? 결국 오늘도 큰 소득 하나 없이 구차한 목숨만 건지고 일과가 끝났다. 하지만 나의 시련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예상대로 다음날이 되자 엑스의 명령이 떨어졌다. 근데 그것은 어제의 결사항전과도 같은 내 행동이 별 것 아니게 느끼지도록 만들었다.
<12시간 안에 최세윤은 윤세나의 가슴을 만져라. 단, 맨가슴이 양 손바닥에 닿았을 때만 인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