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부산한 발걸음으로 누군가가 현관문을 들어선다. 나는 그 발걸음소리만 듣고도 누군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아내였다.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아내의 휴대폰을 원래 자리에 놓고는 얼른 자리에 누워 자는 척 했다. 곧 방문이 벌컥 열리고는 아내가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마치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아내를 쳐다보았다. 내 표정을 보고 아내가 약간 안도의 표정을 지어 보인다.
<자기, 벌써 와 있었네...>
<어, 오늘 좀 피곤해서 일 빨리 끝내고 들어왔어.>
내가 생각해도 놀랄만큼 태연하게 아내에게 말을 건넨다.
<자기, 미안해. 자기 일찍 온줄 알았으면 내가 밥도 차려줘야 되는건데!>
<뭐, 저녁 생각도 별로 없어!>
<자기, 정말 미안. 근데 나 지금 친구들이랑 약속 있어서.... 저녁은 엄마한테 봐 달라고 했으니깐 엄마랑 먹고... 나 잠깐 친구들 얼굴만 보고 금방 올게. 괜찮지?>
<알았어. 대신 일찍 들어와!>
<알았어. 내가 우리 서방님 보고싶어서라도 금방 들어와야지... 참! 근데 내가 핸드폰을 놓고 가버렸네... 핸드폰 어딨더라...>
아내는 핸드폰을 찾더니 이내 핸드폰을 매가 먹이를 낚아채듯 빠른 손동작으로 집어든다.
<자기, 혹시 내 핸드폰 몰래 본거 아니지?>
<뭐? 핸드폰을 보긴... 내가 언제 당신 핸드폰 몰래 본적 있다고...>
<호호, 하긴 그래... 뭐 봐봐야 볼것도 없긴 하지만...>
내 천연덕스런 거짓말에 아내가 무척이나 만족스런 표정을 짓는다.
<자기, 그럼 나 금방 올테니깐 조금만 기달려!>
아내가 마지막 인사말을 건네고는 내 볼에 쪽하고 뽀뽀를 해주고는 몸을 일으킨다. 순간적으로 아내가 다가올 때 아내의 향기가 내 코를 찌른다. 처음 맡아보는 향수였다. 그러고보니 아내의 옷차림도 의미심장했다. 치마길이가 짧지는 않았지만 몸에 착 달라붙는 스타일이었다. 걸을때마다 엉덩이의 굴곡이 완연히 드러난다. 더군다나 어떻게 화장을 했는지 별로 진한 화장같지도 않은데 이상하게 아내의 얼굴이 무척 화사해보였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지금 아내의 전체적인 모습은 남자를 기쁘게 해주는 모습 그 자체였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또다시 요동친다. 무언가가 울컥 올라올 것만 같다. 하지만 나는 요동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그저 아내가 집을 나서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만 볼 수 밖에 없었다.
아내가 집을 나서자 나는 다시 침대에 몸을 눕혔다. 원래는 잠을 자려고 했지만 이 상황에서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방금 본 아내의 핸드폰이 자꾸 머릿속에 떠오른다. 이정길... 아내의 핸드폰에 유난히 많이 보였던 이름이었다. 수많은 문자와 통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도대체 그 남자가 누구길래 하루에도 수십통의 다정스런 문자와 통화를 주고 받았단 말인가... 하지만 아직 단정지을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저 먼 친척뻘되는 동생일수도 있었다. 설마 내가 상상하는 그런 불길한 그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일찍 온다던 아내는 자정도 훨씬 넘은 늦은 시간에 들어왔다. 술을 약간 했는지 술냄새가 풍긴다. 속으로는 무척이나 화가 났지만 이상하게 더욱 침착해진다. 극한상황에 몰리다보니 나도 평소에 모르고 있었던 인내력이 저절로 발휘가 된다. 집에 들어온 아내는 제일 먼저 샤워부터 한다. 잠시후 다 씻고 나온 아내가 변명을 한다.
<여보, 미안해! 일찍 올라고 했는데 너무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라서 도저히 못빠져나오겠더라고요...>
<아니, 아무리 오랜만에 만난 친구라고는 해도 당신은 가정주부야, 주부! 그것도 애까지 딸린...>
<정말 미안해요... 당신 그것땜에 늦게까지 잠도 안자고 기다리고 있었어? 화 많이 났구나?>
아내는 평소 잘 못하던 애교까지 부려가며 나의 화를 가라앉히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더욱 아내가 낯설게 느껴지고 의심만 커지는 것이었다. 아내의 달라진 모습에서 다른 사내의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