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로 프롤로그를 안 읽으면 내용 연결이 안되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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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서.
성철은 자신에 손에 들린 봉투를 무거운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조금 더 느리게 행동한다고 해서 피할 수 없는 일 이였다. 그는 어차피 할 일이면 서둘러 저질러 버리고 마음이나 후련하자는 생각에 성큼성큼 걸었다.
똑똑.
고급 목재를 사용한 문이 그의 손가락에 얻어맞아 비명을 지른다. 뒤이어 그는 말했다.
"회장님, 접니다."
"들어오게."
성철의 말에 중후하지만 약간은 노쇠함이 묻어있는 목소리가 화답했다. 후우하고 숨을 뱉어낸 후 회장실에 들어선 그는 평소하던대로 허리를 숙여 회장인 연갑에게 인사를 올렸다.
"앉게."
회장은 자신이 먼저 테이블에 앉으며 건너편 의자에 손짓을 하며 자리를 권했다. 성철은 죄지은 사람마냥 고개를 푹 숙이고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인가? 특별히 보고할 일이라도 있는겐가?"
"아닙니다. 실은…"
그는 차마 말로하기 힘들다는 듯 사직서라는 세 글자가 적힌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회장에게 쓱 내밀었다. 제게 뭔가 싶었던 박연갑 회장의 놀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아니! 자네 지금…"
그의 대경한 목소리에 성철의 고개를 더더욱 숙여졌다. 지금 눈 앞에 있는 50대 남자는 그에게 얼마나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었는가. 회장과 성철이 친척관계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지위를 고속 상승시켜 주었고, 몇 년 전 부터는 회장의 측근이라 불리기에도 충분한 지위와 권한을 주었다.
사회라는 곳은 능력만 있으면 만사가 해결되는 게 아니다. 보는 눈이라는 게 있는건데 아직 새파란 성철에게 그 정도 배려를 해주었다는 것 자체가 회장이 그를 얼마나 신뢰하고 아끼는지를 말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사직서라는 이름의 봉투를 내밀려니 어찌 낯짝이 따갑지 않을 수 있으랴.
"도대체 뭐가 불만이고 문제인 겐가? 내 자네에게 섭섭치 않게 대우 해줬다고 생각하네만…"
"회장님께서 저를 얼마나 믿어 주시는지 스스로 잘 아는데 어찌 불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믿음을 저버린 게 죄스러울 뿐입니다. 회사를 그만두고자 함은 저 스스로의 사정 때문입니다."
"으음…"
무거운 침묵성을 터트리는 연갑의 머릿속에 여러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성철이 지금 저러한 행동을 하는 건 몸값을 올리거나 더 바라는 게 있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약간은 차가운 성미와 냉철하고 계산적인 면이 있는 성철이지만 그렇다고 못 되어 먹은 사람도 아니지 않은가. 한없이 미안해하는 그의 표정도 가식이라 보기엔 너무나 진중했다.
"자네의 그 사정이라는 거, 어떻게 돌릴 수 없는 문제인가?"
"죄송합니다. 제겐 형제와도 같으신 분과 연관된 문제인지라…"
"으음, 자네 사정이 그리도 중하다니 내 더 이상 붙잡진 않겠네. 다만, 자네의 자리는 비워놓을테니 언제라도 다시 돌아올 생각이 들걸랑 망설이지 말게나."
"감사합니다. 회장님."
끝까지 자신을 배려해주는 회장의 마음 씀씀이에 끝내 눈시울이 붉어지는 성철 이였다.
새벽 5시에 일어나 회장의 스케줄에 대해 꼼꼼히 체크하던 버릇이 들었던 성철은 아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이른 시각에 잠자리를 정리했다. 10평형 원룸 스타일의 오피스텔에서 홀로 살고있는 덕분에 방 안에는 적막감만 가득한 가운데 집 구석구석을 치우고 마트에서 미리 사두었던 반찬들을 식탁위로 옮기며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아… 사먹는 밥도 이젠 지겹네, 지겹워. 어디 참한 여자 좀 없나…"
올해로 서른. 아직은 젊다고 할 수 있는 나이지만 그 정도 나이 먹도록 여자와 제대로 한번 사귀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은 분명 비정상적인 게 틀림없다. 그렇다고 완전 숫총각에 여자를 모르는 순둥이는 아니였다.
그가 여자를 사귄 경험이 일천한 이유는 두 가지로 나뉜다. 첫 째는 어렸을 때 지독한 가난을 경험한 덕분에 성공이라는 과제에 너무나 충실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성철의 아버지는 돈푼이라도 생길나치면 바로 싸들고 도박하러 나가셨다. 그 덕분에 그야말로 하루하루 끼니 연명하는 게 위태울 지경이였고 그것은 명훈도 마찬가지였다. 그 악몽같은 기억을 되새기며 악착같이 공부해서 어려운 환경에서 대학을 졸업했고 또 그 뒤로도 일, 일, 일 뿐 이였다. 여잘 만나를 여유 따위는 없었다.
두 번째 이유는 사랑이라는 것 자체를 크게 믿지 않기 때문이다.
성철의 부모님만 하더라도 너 없으면 나 죽네, 너 없으면 나는 좆도 아니네 하면서 양가의 반대를 무릎쓰고 혼인 했으면서 채 몇 년이 하루가 멀다하고 피 터지게 싸우지 않았는가.
물론 그 분쟁의 원인은 아버지의 도박과 극에 달한 가난 이였다.
그렇다고 난 그렇게 되지 말아야지 하며 홀아비 냄새 풀풀 풍기며 솔로로 늙어죽을 생각은 아니지만 특별히 마음이 외롭거나 사랑을 하기 위해 여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철이 그나마 결혼할 생각을 하는것은 지금처럼 혼자 살기엔 너무 불편했기 때문이고, 솔직하게 한 가지 덧붙이자면 스님처럼 성욕 참아가며 살아갈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이 어떤가? 여자들? 자기 인생이 희생되는 게 싫다고 신이주신 축복인 출산도 않으려 한다. 그리고 결혼의 조건은 남자의 능력,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돈이다. 이런 시점에서 남녀 사이에 사랑과 정을 운운하는 게 우습게 된 세상이라고 생각하는 성철이였다.
그는 자신의 돈을 보고 결혼할 여자라도 좋으니 집에서 살림 잘하는 여자 하나 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식사를 마쳤다. 이 시대에 그런 여자가 흔친 않지만 젊은 나이에 꽤 벌어둔 그의 재산을 이용하면 불가능하진 않으리라. 시계를 보니 시침이 7시를 가르키고 있었고 샤워나 하자는 생각에 조그마한 방 한쪽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샤워를 하기엔 조금은 협소한 욕실이지만 이젠 적응이 되었기에 문제될 건 없었다. 20분가량 몸을 씻어낸 그는 대충 몸에 흐르는 물기를 닦아내면서 TV 위에 있는 핸드폰을 들어올려 명훈의 핸드폰으로 연락을 했다.
-사랑은 얄미운 나비인가바~-
귀에 익은 트로트 통화 연결음이 들려 오가다가 "여보세요"하는 명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님, 접니다."
"아, 성철이냐. 자식아, 지금이 몇 신데 전화를… 아무튼 연아한테는 말 해뒀다. 겁을 많이 먹었는지 몇 번이나 믿어도 되는 사람이냐고 묻더라. 너, 우리 연아가 너무 예쁘다고 이상한 마음 먹으면 안된다?"
"큭, 형님. 진심이십니까? 아함, 회장님이 언제든 돌아오라고 하셨는데…"
"뭐? 지금 너 나 협박하는 거냐? 잔말 말고 오늘 6시에 우리 집으로 와라. 우리 어머니가 연아랑 너한테 식사 대접을 하신단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끊습니다, 형님."
"오냐."
핸드폰을 끊고 이제 남은 시간을 뭘하나 생각하는데 갑자기 그의 뇌리를 강타하는 사실이 하나 떠올랐다. 명훈 형님의 다섯 살 차 여동생이자 그에겐 동네 누나였던 백은진.
"이런 제기랄!"
어쩌자고 덥썩 형님 댁에서 식사를 한다고 허락한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성철 이였다. 은진 때문에 그는 의도적으로 명훈 형님의 집에 방문하는 걸 피했다. 별로 그럴 일도 없었지만.
이래서 사람은 죄짓고는 못 사나보다. 그가 아직 고향서에서 살 때, 그러니까 그의 나이 열여덟이고 은진의 나이가 스물 둘일 때였다. 그 때 은진은 성철 못지않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여자임에도 고등학교까지 진학했다.
그리고 졸업 후 그녀는 읍내에 관공서에 취직을 했었다.
시골 토박이답지 않게 살도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와 윤기있는 머리칼이 인상적인 그녀는 단연 마을에서 인기가 드높았고 직장을 다니면서 여성의 성숙함까지 더해지자 그녀는 마을 청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그런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것은 성철도 다를 바 없어 은근히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문제의 그 날, 성철은 자신이 일하던 양조장의 주인인 김씨 할아버지에게 막걸리를 얻어마셨다. 그는 집 안이 형편 때문에 열다섯 살부터 양조장에서 일했는데 김씨 할아버지가 슬하에 자식이 없어서인지 그를 귀여워하며 여러모로 잘해주었고 성철이 술맛을 알고난 뒤로는 그 날처럼 간혹 술을 주기도 했다.
꽤 많은 양의 막걸리를 들이킨 그는 꽤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비틀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또 도박하러 갔을 것이 분명하고 어머닌 어디 돈벌이하러 가셨을 게 뻔하니 잠이나 한숨 자자는 생각을 하는데 자신의 집 마당에서 여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성철의 어머니를 찾고 있었다.
"성철 어머님예, 계십니꺼."
목소리의 주인은 은진이였다. 당시 한창 직장을 다니던 은진은 레이스 달린 블라우스와 숙녀모자를 착용했는데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니 성철의 눈이 팽 돌았다.
"어? 성철이 아이가?"
그녀는 성철이 충혈된 눈으로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데 한점 의심도 못하는 듯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녀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성철의 억센 왼손이 그녀의 허리를 휘감고 오른손이 가슴살로 파고들고 있었다.
"아악! 성, 성철아. 안된다. 참말로 이라믄 안된다."
그녀는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은진의 몸에서 나는 향긋한 살내음에 취해버린 그는 이미 발정기에 다다른 개나 다름 없었다. 그녀를 거칠게 방으로 끌고 가서 범해버렸고 그 날 은진은 처녀를 잃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였다.
성철이 어렸을 때보단 시대가 많이 발전했지만 그래도 그 때까진 고지식함이 하늘을 찌르는 시골 농촌이기에 강간을 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손해를 보는 건 성철보단 은진이라 할 수 있었다. 성철은 그것을 이용했다.
정말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젊은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겁탈 당한 걸 소문내겠다고 협박하며 그 후로 몇 차례나 은진에게 관계를 요구했다. 그리고 은진은 제발…이라는 말만 반복할 뿐 그에게 말로도, 힘으로도 반항하지 못하고 순순히 몸을 빼앗겼다.
그 생각을 하니 성철은 또다시 마음 한 쪽이 괴로웠다. 순수하고 착한 은진이 상처 받았을 생각을 하니 정말 왜 그랬을까 싶었다. 충동적인 겁탈로도 모자라 그것을 빌미 삼아서 몇 차례나 그녀와 관계를 가지다니…….
그는 세상에 있는 수많은 악인들을 욕 해왔다. 뉴스에 나오는 비인간적, 비도덕적 범죄자에게 손가락질 했고 돈 때문에 천륜을 저버린 기사가 신문에 실린 걸 보고 말세라며 혀를 쯧쯧 찼다. 그런데 그 자신이 세상에 다시없을 파렴치한과 뭐가 다를까.
"하아…"
그는 답답한 듯 크게 소리내어 숨을 뱉어냈다. 그의 인생일대에 가장 큰 실수였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은진이 누나는 서른 다섯 살이 되었지만 그녀는 잊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평생 은진은 마음 한 쪽에 그에게 당했던 상처를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여자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여자란 그런 존재니까.
"언제까지 피할 순 없었어……. 차라리 잘 된건가? 이번에 가서 은진 누나랑 얘길 해봐야겠어. 내가 저지른 일이니까 어떻게든 해결 해야겠지. 그녀가 원한다면 합당한 벌을 받겠어."
이를 악물고 주먹을 꼭 쥐는 성철 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