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동~
"어머님, 접니다."
성철이 벨을 누르자 안에서 부산한 소리가 들리더니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명훈의 어머니 한경숙이 반가운 얼굴로 문을 열었다.
"성철이 왔나! 밖에 춥지? 퍼뜩, 아니 어서 들어오그레이… 아니아니, 들어오거라."
그는 경숙의 어눌한 서울말에 피식하고 실소를 머금었다. 유식해보인다는 이유로 서울말을 사용하는 경숙 때문이였다. 명훈이 사투리 써도 누가 무식하다고 안 한다고 갖은 설득을 해보았지만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막무가내로 서울말 예찬론을 늘어놓은 어머니를 어찌 막겠는가.
성철과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경숙은 한 마디 하는 걸 잊지 않았다.
"성철이 니 지금 내가 사투리 쓴다고 웃는기제? 봐라, 명훈아. 서울말 안 쓰면 사람들이 이래 웃는다 아이가. 하이고마, 서울 말씨 공부도 마이 했는데 고향 사람보면 사투리가 저절로 튀어 나온다안카나."
경숙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선 성철은 명훈의 집이 생각보다 꽤 넓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아파트 자체가 유명 건설업체가 지은 고급 아파트였지만 이렇게 고급스럽고 넓은 실내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니. 성철은 자신만 가난을 이겨내고 성공을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내심 흐뭇했다.
명훈은 포크레인 기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데 그 방면에서는 알아주는 기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월 수입도 800만원에 이른다. 그런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성철로써는 드넓은 명훈의 주거 공간이 조금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임마, 왔냐?"
명훈은 성철의 이름을 거의 부르지 않는다. 명훈에게 있어 성철의 이름은 "임마", "자식" 등으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성철은 그런 명훈의 호칭이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식들을 줄줄이 사탕으로 낳는 시절에 외아들로 태어난 성철에겐 친형처럼 느껴져서 참 좋았다.
하지만 명훈이 내뱉는 한 마디 때문에 조금은 명훈이 원망스러워지는 성철.
"은진아! 나와 봐! 성철이 왔어! 성철이 고향 떠나고 처음보는 거지?"
순간 성철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이미 난 모든 걸 각오하고 왔다. 놀라 것 없어. 은진이 누나가 명훈 형님하고 어머님 앞에서 그 얘길 하려고 하진 않을거야. 있다가 따로 만나서 얘기하면 돼. 겸허하게 받아들이자. 겸허하게…"
여러 개의 문 중에서 한 쪽 문이 열리더니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거실로 들어섰다.
"은진… 누나?"
그는 은진의 모습을 보고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성철과 네 살 차이가 나는 은진이지만 외형상으로는 동년배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은진의 모습이 젊기 때문이였다. 이문새의 광화문 연가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이제 모두 세월따라 변하였고 또 은진도 그랬을 거라고 가끔 머릿 속으로 상상 했었다. 물론 서른 네 살이면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여자 나이 삼십대 중반이면 관리하지 않으면 슬슬 아줌마티 나기 마련이다.
성철 본인도 제법 젊게 사는 사람이라고 자부하지만 그런 성철과 동년으로 보이다니.
"성철아, 우리 은진이 이쁘제? 야가 유치원 선상님을 하는데 어린 아들하고 같이 있다 보니까는 몸도, 마음도 젊어지는 갑다. 인사들 안하나?"
"예? 예, 어머님. 은, 은진이 누나. 안녕? 꽤 오랫… 만이지?"
"응. 너 많이 컸구나…"
둘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였다. 은진은 성철과 눈빛을 마주치기 힘든 듯 바닥 한 구석에 앉아서 시선을 돌리고 있었고 성철도 식탁 위에 앉아서 명훈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흥, 명훈 오빠. 저 사람이 내 매니저 될 사람인가요?"
"아, 널 잠깐 깜빡했구나. 둘이 인사해라. 여긴 내 사촌동생 연아. 여긴 내 고향 동생인 성철."
지역으로 따지자면 같은 지역에 살았지만 다른 읍에서 살았기에 명훈의 사촌 동생임에도 성철은 연아가 초면 이였고 연아도 마찬가지였다.
"안녕하세요. 이성철이라고 합니다. 형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난 백연아에요."
그녀는 입술을 삐죽하며 삐딱한 발음으로 그의 인사에 화답했다. 연아는 지금 상당히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처음에 성철이 이 집에 들어왔을 땐 키도 훤칠하게 크고 몸매도 좋은데다가 얼굴도 꽤 괜찮게 생겨서 호감이 좀 갔었다. 그런데 자신은 거들떠도 안 보고 저기 조신한 척 다리를 살포시 접어앉은 은진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게 아닌가?
어려서부터 연아의 친척들이 한 자리에 모이면 은진과 연아를 놓고 비교했다. 외모도 톱, 성적도 톱이였지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은진은 늘 연아를 조금씩 앞섰다. 연아의 집이 제법 부유하게 살고 있었음에도 명훈네의 가난을 보고만 있었던 것도 연아가 부모에게 응석을 부리며 도와주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무남독녀라지만 어린 딸이 막무가내로 우긴다고 해서 어렵게 사는 친척을 무시했던 그녀의 부모님도 문제가 있었지만 연아 스스로 독선적이고 오만했다.
그런 과거가 있음에도 스스럼 없이 연아를 친인척으로 대하는 명훈과 그의 가족들이 마음이 넓다할 수 있다.
*1인칭 주인공 시점도 섞어서 쓰겠습니다.*
근처 바(Bar)를 찾아서 은진 누나를 기다리고 있다. 어둡게 깔린 조명이 내 마음을 조금은 내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명훈 형님의 어머니가 이것저것 많이 차려주셨지만 송구하게도 입에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우적우적 먹어댔다. 은진 누나는 나랑 눈이 마주칠라치면 고개를 돌려버리는데 그것이 나에 대한 민망함인지, 아니면 분노인지, 아니면 슬픔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불안하고 초조했다. 게다가 연아라는 그 어린 계집은 뭐가 그리도 짜증낼 일이 많은지 사사건건 나와 은진 누나에게 성질을 부렸다. 연아의 투정이 나와 은진 누나의 어색함을 많이 완층 해주었다는 효과가 있었지만 아무튼 정말 나이값 못하며 어린티 나는 안하무인격 계집애였다.
딸강.
맑은 방울 소리와 함께 출입문이 열렸다. 몇 번째 다른 사람이 지나가서 조금은 긴장을 푼 상태로 고개를 돌렸는데… 그녀였다. 후우… 나는 눈 앞에 있는 술을 홀짝 들이켰다. 쓰다. 일만 잘하는 일꾼인 내게 이런 술집와서 노는 게 익숙할 리 없었고 당연히 술맛은 썼다.
"와인 아무거나 한 병 주세요. 도수 약한걸로…"
"시음 하시겠습니까?"
"시음이요?"
"아, 이런 곳에 익숙치 않은 분 인가보군요. 술이 가짜거나 물을 탔는지 조사하기 위해서 시음이라는 걸 합니다. 말 그대로 맛을 시험하는 거죠. 시음 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술맛을 몰라서 가짜인지 판별해낼 능력도 없으니 그냥 믿겠습니다."
"가격을 어느 정도 하는 것으로 하시겠습니까?"
"귀한 분이 오시니 비싼걸로 부탁드립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녀가 내게 걸어오는 걸 바라보며 바텐더에게 주문했다. 그녀는 몇 번 고개를 돌려서 나를 찾았는데 내가 손을 들어서 그녀에게 위치를 알렸다.
또각또각.
그녀의 구두굽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만큼 내 심장도 크게 뛴다. 그만큼 내가 한 짓은 가벼운 죄가 아닌 것이다. 키 높은 의자 하나를 빼내고는 그녀에게 앉으라는 눈빛을 보냈다.
"왜 보자고… 했어."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노골적으로 내게 어떤 감정을 표출하진 않았지만 결코 태연하게 내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게 아니란 뜻이다.
"일단 한 잔씩 하고 얘기하자."
"나 술 못하는데…"
"와인이고 도수가 약한 술이야. 이름도 모르는 술이지만."
옆구리가 날씬한 고풍스런 잔 두 개를 받아서 그녀와 내 앞에 한 잔씩 따랐다. 향기를 맡아보니 과일이 첨가된 듯 상큼하고 향긋한 향이 났고 털어넣듯 마셔버렸다. 은진 누나도 분위기에 동조하려는 듯 들이켰다.
"사실 이 얘기 꺼내는 것 좀 망설였어. 우리 옛날 얘기 말이야…"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직시한다. 부담스럽고 얼굴 가죽 따갑게 만드는 그녀의 눈빛에 괜히 술 한잔 더 하려는 척하며 그녀의 시선을 슬쩍 흘린다. 이런 노련한 대처는 회장님의 비서일을 하며 생긴 습관이다.
"우선 미안했다는 얘길하고 싶어. 상투적이고 당연히 해야 할 말이지만 그 말밖에 해 줄 말이 없어."
"……."
그녀는 그 때 일이 떠올라서 설움이 북받치는지 눈물을 글썽였다. 아, 이런 젠장. 여자는 위로한답시고 부드럽게 다독이면 더더욱 감정적으로 변한다더니. 비서일을 하며 웬만해선 당황하지 않고 냉철하게 행동하는 버릇이 들었지만 지금 이 앞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
허둥대며 입에서 나오는대로 핑곗거리를 이어갔다.
"누나도 알다시피 누나는 우리 마을에서 인기가 최고였잖아. 나도 누나를 엄청 좋아했는데 다른 녀석한테 뺏기기 싫어서…"
하아, 나란 놈도 참. 사과는 진심으로 해야된다는 걸 알면서도 왜 나오는대로 지껄이는 게냐. 나의 궁색한 변명에 그녀는 이제 줄줄 흐를 정도로 울고 있었고 주변에서 어머 쟤네 봐라하는 눈빛으로 쳐다본다. 아, 이건 내가 생각한 스토리가 아닌데……. 차라리 화를 냈으면…
"미안…"
내가 입을 놀릴수록 그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량이 비례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하아. 역시 그녀에겐 큰 상처로 남아 있었다.
"누난 지금도 이쁘지만 그 때 너무 이뻤잖아. 그래서 나도 모르게 실수했어."
끙, 하다하다 이런 느끼한 말을… 헉! 그런데 반응이 좀 좋은 것 같네?
"누난 그 때 동네 남자들한텐 꿈밖에 꿀 수 환상이였는데, 역시 지금도 변한 게 하나도 없네."
억! 반응 좋아! 반응 좋아!
결국 그 날 나는 그녀에게 갖은 아부를 떨다가 지친 입술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